2014 OCI YOUNG CREATIVES

남혜연_양유연展   2014_0717 ▶ 2014_0813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4_0717_목요일_05:00pm

남혜연展 /『You are happy』 양유연展 /『그들이 우네』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OCI 미술관 OCI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수송동 46-15번지 Tel. +82.2.734.0440 www.ocimuseum.org

남혜연 : 정상과 표면"정상적인 인간의 질병을 어떤 의미로 이해하면 좋을까? 무지한 인간만이 현명해질 수 있듯이 정상적인 인간만이 병들게 될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은 아니다. 감기나 두통 또는 기침이나 복통 같은 가벼운 우연적 증상, 즉 증후로서의 가치가 없는 모든 우연적 증상, 그다지 놀랄만한 일이 아닌 주의신호로서의 증상이 평정상태나 균형 상태를 깨뜨리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무엇인가를 교란하는 것이 있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도 아니다." (미셸 푸코,「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서문 ; 죠르주 깡기옘,『정상과병리』, 도서출판 인간사랑, 33-34쪽.)

남혜연_E-motion_고무, 모터, 혼합재료_145×120×120cm_2014

오늘날 정상(正常)은 가느다란 선이 되어가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집단적으로 만들어내는 배타적 특성들로 이루어진 좁은 영역을 가리킨다. 문화나 교육을 통해 우리는 정상성의 범주 안에 들기 위한 치열한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과거에 정상이었던 것들은 오늘날에는 실현하기 어려운 목표들이 된다. 예컨대, 교육적 수월성의 기준은 점점 더 충족시키기 어려운 것이 되어가고 있으며, 정상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사회성의 리터러시는 정보, 데이터, 검색 등의 더욱 더 복잡한 기술들을 요구한다. 한 집단에서 당위적인 것들은 다른 집단에서는 전혀 충분하지 않은 것들이 된다. 정상이 되기 위해 극도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세계 속에서 대부분의 인간들은 소외될 수밖에 없다. 이들은 모두 비정상의 상태에 놓이기 때문이다. 비정상의 상태에 놓여있는 다수가 배타적 정상성과의 접점에서 만들어내는 놀라운 긴장감을 우리는 공공영역에서 발견한다. 공공영역에서 사람들은 정상의 영역에 머물기 위해 복잡한 행동과 태도의 코드들을 숙지해야만 한다. 그 반대의 경우는 광기나 도발, 나아가 테러, 교란, 공격성, 반사회적 행동, 일탈, 위반 등과 연관된 의심이나 처벌을 초래할 수 있다. 정상은 강박과 편집증의 형식을 띤다.

남혜연_Please Smile #2_나무, 모터, 카메라, 컴퓨터, 아이패드, 혼합재료_140×250×75cm_2014

남혜연은 이천 년대 초에 미국으로 건너간 이래 한국과 서구사회 사이에 가로 놓인 문화 혹은 사회구조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간극들을 작업에서 다루어 왔다. 특히 주류문화인 서구문화가 지배하는 글로벌한 공간 속에서 소수성에 속하는 아시아계 여성의 정체성과 관련된 퍼포먼스 및 미디어, 영상 작업들을 지속적으로 제작하였다. 2006년에 발표한 4채널 비디오 작품인「자화상」은 작가 자신이 일상의 생활을 부적절한 도구와 방법들을 영위하는 힘겨운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막대기로 음식을 먹고 밑 빠진 유리잔에 주스를 담아 마시기 위해 노력하는 등, 남혜연이 보여주는 행위들은 명백히 비정상적 범주에 속하는 것들이다. 이러한 소극적 일탈은 지배적 정상성의 강압적이고 배타적인, 좁은 범위를 떠올릴 때 그 경계에서 벌어질 수 있는 미세한 간극들을 떠올린다. 이러한 간극의 표시는 미국의 주류 관객들이나 비주류 이주민들에게 있어 모두 현실과 정상성을 가로지르는 '바깥'이 존재함을 암시한다.

남혜연_Cheeeeese_영상_00:04:17_2014

뉴미디어아트라고 불리는 장르의 경우, 가장 두드러진 형식적 특징은 자동성과 상호작용을 통한 관객의 참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남혜연의 2013년 작「Hooray!」는 일렬로 벽면에 설치된 수많은 인형들 각각이 관객이 접근하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는 인터랙티브 작품이다. 소시민들의 집단적이고 강박적인 두려움을 '인사'라는 행동을 통해 유머러스하게 보여주는 이 작품에서는 작가가 사회 속에서 감지하는 무작위적이고 감정적인 복종의 강요 혹은 자기 검열에 대한 반어적 표현을 볼 수 있다. '감정 노동'이라고 불리는 사회적 직무활동에서도 볼 수 있듯이,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특정한 사실이나 인물에 대해 '호의' 내지는 '호감'을 표시해야 하는 경우 이러한 왜곡을 우리는 권력에 의한 '힘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바라보게 된다. 남혜연의 작품에서 이러한 관계는 역시 가장 미세한 차이들로부터 비롯되는데, 그 가장 대표적인 것은 얼굴 위에 나타나는 표정, 그 중에서도 '웃음'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번 전시에서 상영될 비디오「Cheeeeese」는 작가 스스로 5분 동안 웃는 자신의 얼굴을 입을 클로즈-업 해서 보여주는 작품이다. 오노 요코의 1966년 작「Smile」을 연상시키는 이 작업은 전자가 몇 초 동안 일어난 표정의 변화를 초당 500 프레임으로 고속촬영하여 길게 보여주는 작품인 반면, 남혜연의 작품은 실시간으로 웃는 표정을 최대한 길게 유지하기 위해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웃는 표정을 유지하는 퍼포먼스로 이루어져 있다. '불편함'이 극대화될수록 그것은 자연스러움(natural) 속으로 편입된다. 사회적 관계들은 모두 이렇게 극대화된 불편함과 그 안에 내재된 권력의 관계들을 중립적인 형식들로 표명하고 당위화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남혜연_Hooray #2_나무, 빛센서, 모터, 파워_45×51×6cm_2014_부분

가장 최근의 키네틱 작업인「E-Motor」는 이러한 힘의 관계들을 탄성을 지닌 얇은 고무 레이어와 그것을 잡아당기는 다수의 모터들로 재구성한 작품들이다. 나이든 여성의 얼굴은 각각 표정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민감한 지점들에 연결되어 모터의 연결축이 움직임에 따라 늘어났다 줄어들면서 미묘한 감정적 표현들을 만들어낸다. 이 작품은 '얼굴'의 표면이 의미와 긴장들에 의해 영토화 된 힘의 장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얼굴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접속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회적 관계들은 마치 얼굴의 표면을 통해 필터링되어 이미지화 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얼굴은 '웃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웃음이라는 기본 원칙 위에 다수의 힘들이 서로 점유와 전유의 전쟁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웃음은 동시대 사회가 강요하는 가장 핵심적인 정상성의 범주다. 웃지 않는 인간은 그곳을 떠나거나, 혹은 스스로 소외되어야 한다. 이미 남혜연은 2011년에「Please smile」이라는 인터랙티브 작업을 통해 관객들에게 웃기를 요구하는 수많은 손짓들을 시각화 한 바 있다. 관객들이 접근하여 웃으면 수많은 손들이 환대의 제스추어를 보여주는 이 작품은 사회적 소통의 가장 기본적인 행위인 인사와 호의의 교환을 일종의 자동적 기호로 대치하고 있다. 벽면에 나열된 손들의 기계적 반응은 웃음을 요구하는 주체 너머에는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벽 밖에 없다는 상황을 그로테스크하게 보여준다. 데스몬드 모리스는「털 없는 원숭이」에서 신생아들의 웃음이 생존을 위해 진화한 자기방어기제라고 설명한 바 있다. 어쩌면 현대사회에서 웃음은 성인이 되고나서, 심지어 죽을 때까지 사회 안에서 모든 구성원들이 끊임없이 확인해야 하는 배타적이고 선별적인 정상성의 기제로 진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남혜연_I-My-Me_고무, 모터, 혼합재료_145×120cm_2014

남혜연의 작업은 비정상적 범주의 행동들을 반복함으로써 환기되는 정상성의 비좁은 그림자를 보여준다. 정상성이 분열적 층위들을 빠르게 오가는 것으로 밖에는 선취될 수 없어 보이는 한국과 같은 사회에서 정상이란 예외적이고 복합적이며 설명하기 어려운 일종의 투쟁의 장이 된다. 예술은 반대로 끊임없이 정상성의 범주를 넓히고 비정상을 내부 혹은 경험과 언어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분투한다. 나는 작가가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이러한 미션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되어 나갈 것인지 매우 흥미로운 예측과 기대를 하게 된다. 미국에서 그가 경험한 이방인으로서의 경험이 보다 강력한 테마와 시각적 도전으로 이어지게 되길 바란다. ■ 유진상

양유연_진심_장지에 채색_41×53cm_2014

그들(나, 너, 그 그리고 우리)이 우네 - 1. 그림자가 나타났다. ● '그림자'는 몸이 만드는 어둠이다. 그럼에도 몸의 기원과는 무관하게 존재하기도 한다. 기원이 생략된 그림자는 왜곡되고 변형되어 구체적인 시공간을 이탈한다. '그림자'에 내재된 두려움은 이에 기반을 둔다. 양유연의 작업에서 그림자가 전면에 등장한 것은「헤드라이트」(2009)이다. 화면은 어둠과 밝음으로 나뉜다. 계단은 이를 구획한다. 중앙에는 작가의 고민, 상처, 기억을 담지한 한 소녀(그러나 '유령'에 더 가까운)가 서 있다. 그리고 계단에 소녀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그림자는 밝음의 세계에 있는 몸에서 빠져 나와 계단 위의 어둠의 세계로 향한다. 계단이 나눈 구획은 그림자에 의해 지워진다. 어둠과 밝음은 '이곳'과 '저곳'의 세계가 아니라 바로 여기의 세계이다. 명증한 세계의 붕괴에 따르는 괴이쩍은 기운은 화면 중앙에 놓인 소녀의 지워진 얼굴에서도 나타난다. ●「헤드라이트」는 이후 작업의 단초를 제공한다. 눈이 지워진 소녀는 자신의 뒤에 놓인 '그림자'를 직시하지 못한다. 두려움의 근간인 '그림자'가 무엇인지, 어떻게 왜곡 변형되었는지, '나'와 '그림자'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할지 알지 못한다. 오히려 이 작업은 불명료한 감정의 상태만이 구현된다. 그리고 2014년, 다시 그림자가 전면에 등장한다.「그림자」에는 건물의 벽면이 사선으로 기울어져 있고, 한 쪽 구석에 그림자가 등장한다. 어딘가에 숨어서 바라보듯 그림자는 구석으로 몰려 있다. 기원이 부재한 이 대상은 있으면서 없는 대상, 즉 '유령'이다. 예컨대 대상이 부재한 상태에서, 대상의 음영만이 홀로 움직이는 방식이다. 그림자는 규칙, 기준, 틀에서 벗어난다. 그러기에 크기도, 부피도, 길이도 농도도 가늠할 수 없다. 명증한 세계에서 벗어난 이 그림자는 이곳과 저곳을 떠다니면서 경계를 지운다. 어둠은 밝음이 되고, 밝음은 어둠이 된다. 멈추지 않는 이 운동성 자체가 '그림자'이다. '나'로부터 출발하여 세계로 뱉어진「입김」(2014)은 어디로 어떻게 향할지 모른다. 알 수 있는 것은 그저 움직이고 있다는 그 사실 뿐이다.

양유연_미러볼_장지에 채색_91×70cm_2014

『그들이 우네』展은 양유연의 작업이 '그림자'에 관한 것이었음을 표명한다. 양유연은 첫 번째 개인전『흉』(2010, 꽃+인큐베이터)에서 '다소' 단순하고 직설적인 초현실적 이미지의 나열을 선보였으며, 두 번째 개인전『한 낮에 꾸는 꿈』(2012, 갤러리소소)에서 '다소' 추상적인 내면의 상처(의 기억)를 '저 멀리'의 환상으로 더듬고자 했으며, 세 번째 개인전『가득한 밤』(2013, 갤러리 분도)에서는 추상적인 내면과 직면하고자 했고, 이를 바탕으로 환상을 초과해 존재하는 현실을 탐독했다. 그리고 지금 네 번째 개인전『그들이 우네』(2014, oci미술관)에서 양유연은 거리감을 두고 그들이 우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그러나 최선의) '동조'를 보인다. 결국 그의 작업은 '저 멀리'의 문제를 '지금-여기'에서 '나'의 문제였음을 알아가는 단계이다. 어찌 끝날지 모르는, 어쩌면 계속 미끄러져야만 하는 이 미로 같은 여정에 '그림자'는 언제나 함께였다.

양유연_사소히 여길_장지에 채색_91×70cm_2014

2. 우리는 보았다. 두 눈으로 똑똑히 ● 「1980.05.20.」에는 "우리는 보았다. 두 눈으로 똑똑히"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그러나 양유연의 작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눈이 멀었다. (전작들에서도 '보는 것'이 차단된 이미지는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는 더욱 극단적인 형태를 보인다.) 눈이 지워져 있거나(「달밤」,「그림자」), 스스로 눈을 가리거나(「붉은 불빛 아래」,「밝은 미래」,「숨」), 다른 곳을 보거나(「깊고 차가운」,「미러볼」,「산책」), 눈을 감는다(「버짐」,「입김」,「늦은 잠」,「작은 아이」). 시각체계가 차단된 상황에서 이들이 똑똑히 보기 위해서는 다른 지각체계가 필요하다. 다시, 2009년 작품「헤드라이트」를 떠 올려 보자. 화면에서 어둠과 밝음을 구획하는 계단은 제목이 지시해주듯 강력한 빛에 의해 지각된다. 그리고 계단을 온 몸으로 더듬고 있는 그림자에 의해 지각된다.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그림자는 온 몸으로 훑고, 느끼고, 지각하고 판별한다. 세계와 접촉한 피부를 통해, 즉 촉각을 통해 세계를 인지한다.

양유연_입김_장지에 채색_86×100cm_2014

「사소히 여길」(2014)은 화면 가득 '흉'을 지닌 손바닥을 보여준다. 피부의 '흉'은「버짐」(2014),「여름흔적」(2014),「작은 아이」(2014)에도 등장한다. '나'를 통해 세계에 뱉어진「입김」이 끊임없이 미끄러지며 마주한 세계는 그들에게 '흉'을 남긴다. '흉'은 내 몸 밖에서 안으로 흘러드는 다른 몸이다. 다른 몸을 자기 몸에 들이는 방법은 낯설고, 기이하고, 고통스럽다. 전시제목『그들이 우네』처럼 그들은 울고 있지만, '흉'이 되기 마다하지 않는다. '흉'은 촉각적 지각체계의 고단함의 표상이다. 작가는 이를 멈추기 보다는 향유한다. 물론 '흉'이 상처 전체를 드러내지는 못한다. '흉'은 상처를 징후적으로 표현 할 뿐이다. ●고통스러운 '흉'을 향유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다른 몸이 나의 언어로 표상되지 않는다는 절대적 외부성을 인정하고, 나의 언어를 의심하며 조심스럽고, 힘겹게 마주해야 한다. 몸에 흔적을 남긴 기이하고 낯선 다른 몸을 거부 할 수도, 그렇다고 전적으로 수용 할 수도 없다. 외부로 부터 흘러 들어와, 나를 흐르게 하고, 나로부터 흘러나가 외부를 흐르게 한다. 보기 위한 익숙한 두 눈은 차단되었다. 이때 할 수 있는 일은 예민하게 반응해야하고, 그들과 소통 할 수 있는 제3의 언어를 모색해야 한다. 그것은 낯선 이미지 한 장을 제시하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고통스럽지만 대면해야하고, 소란스럽지만 귀기울여야하고, 불편하고 어색하지만 인정해야 한다.「사소히 여길」그것들과 수평적으로 놓이기 위항 번잡함을 감내, 노력해야 한다.

양유연_붉은 불빛 아래_장지에 채색_45×45cm_2014

3. 진심 ● 물론, 통증은 고통스럽다. 통증은 나의 자유를 제한한다. 그러니 치유하거나, 잊어버리는 동일화의 과정이 손쉬워 보인다. 그러나 양유연은 이를 거부하고 '질환'으로 바라본다. 그리고「진심」(2014)으로 마주한다.「진심」의 화면 중앙에는 두 손이 있다. (부가적으로 말하자면, 두 손은 그림자와 대상의 유사성과 상이함의 관계를 그대로 닮아 있다.) 어딘가 모르게 불편하다. 그 손은 추운 날씨 때문인지 얼어 있다. 분명, 외부의 어떤 자극에 의해 변형/변질 되었다. 한 손이 한 손을 어루만진다. 두 손 모두 얼어 있음에도 그들은 마주한다. 이미 둘 다 차가워진 손은 서로를 매만지며 다독인다. 저 손의 온도가 이 손으로 전해지고, 이 손의 온도가 저 손으로 전해진다. 낯설고 어색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의지한다. 불협화음이 겹친다. 그것이 나에게서 온 것인지, 너에게서 온 것인지, 그에게서 온 것인지 알 수 없다. 확실한 사실은 나, 너, 그가 불협화음을 자신의 문제로 자각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우는 모습을 바라보던 양유연은 이제 그들과 함께 운다. ■ 이대범

Vol.20140717b | 2014 OCI YOUNG CREATIVES-남혜연_양유연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