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얼굴, 멜랑콜리

차경희展 / CHAKYOUNGHEE / 車慶姬 / photography   2014_1126 ▶ 2014_1206 / 일,공휴일 휴관

차경희_푸른 방01_피그먼트 프린트_66×100cm_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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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4_1127_목요일_06:00pm

작가와의 만남 / 2014_1129_토요일_04:00pm_세미나룸

후원 / 서울문화재단_한국문화예술위원회_미진프라자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일,공휴일 휴관

사진‧미술 대안공간 스페이스 22 SPACE 22 서울 강남구 강남대로 390 미진프라자 22층 Tel. +82.2.3469.0822 www.space22.co.kr

사진·미술 대안공간 SPACE22의 여섯 번째 중진작가 지원전시로 차경희 개인전,『시대의 얼굴, 멜랑콜리』를 기획한다. 그동안「생의 터, 사이의 공간」(2013),「터, 지속된 시간」(2013) 등의 풍경 연작으로 주목을 받은 차경희는 이번 세 번째 개인전『시대의 얼굴, 멜랑콜리』에서 포트레이트 작업을 새롭게 내놓았다. 풍경에서 사람으로 옮겨왔을 뿐, 전작에서 보여준 사진의 고요한 밀도와 대상과의 아름다운 거리는 여전하다. 온 산하에 차고 넘치는 생명의 불가해한 신비와 함께 동그란 무덤이 있는 차경희의 풍경 연작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삶의 흔적으로서의 무덤, 삶의 끝이 아니라 삶 가운데로 생생하게 들어온 무덤을 볼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 전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과장된 우연의 반복이나 작위적인 느낌이 제거되어 있다. 불필요한 비약이나 아우라로 관객을 유인하지도 않는다. 비슷한 시기에 창작된 작가의 두 작품 세계는 기나긴 사랑의 길 찾기에서 비로소 하나의 통로로 이어지는데, 그것은 바로 '삶-사랑-애도'의 길이다. ● 신작인 '푸른 방' 시리즈와 12년 전의 작업이지만 미발표작이던 '하얀 집' 시리즈를 엮은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멜랑콜리'를 건드리고 있다. '하얀 집'은 정신요양원 사람들이, '푸른 방'은 침대 위에 눕거나 앉아 있는 여인들이 주인공이다. 우리말로 번역이 불가능한 '멜랑콜리'는 사실은 재현이 불가능한 그림자의 영역이다. 견고한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언어화될 수도 없는 바로 것! 그것이 전시의 타이틀이 되었다. 게다가 장르는 '사진'이다. 대상을 합리적으로 인식하기 위해 발명된 기계 장치가 과연 멜랑콜리를 표상할 수 있을까. 아니, 사진으로 옮겨온 멜랑콜리 또한 멜랑콜리라 말할 수 있을까.

차경희_푸른 방02_피그먼트 프린트_66×100cm_2014

고대 그리스인은 피, 점액, 담즙 등 체액을 통해 인간을 네 가지로 구분하였고, 그중 몸속에 검은 담즙의 체액이 많은 사람을 멜랑콜리 기질로 분류하였다고 한다. 그 특유의 기질은 차경희의 사진에서 어떠한 '징후'로만 드러난다. 징후(혹은 증상, 영어로는 symptom, 프랑스어로는 symptôme)의 어원을 좇다 보면 sin(죄), home(집), Saint homme(성자) 등에 닿게 된다. 다양한 의미망을 갖는 '징후'는 의학에서는 병의 인덱스로, 정신분석에서는 표면으로 드러나는 증상의 지표로 간주한다. 정신분석에서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징후는 구조를 반영하는 일종의 기표로 작용하고, 차경희는 멜랑콜리의 징후(은유)들을 찾아 나선다. ● '푸른 방'에서 차경희의 카메라는 서너 시간 동안 대상을 바라보는데, 평범한 이 여인들과 마치 소크라테스식 대화 같은 이야기를 나누며 여인들이 잠깐 말을 멈추거나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촬영을 했다고 한다. 페이스북을 통해 만나거나 혹은 아는 사람의 소개로, 아니면 얼굴만 알고 지내던 사람들의 내밀한 방 안으로 들어가 작가는 묻는다.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요?' 처음 만난 카메라 앞에서 어리둥절하다가 이내 자기도 모르게 술술 나오는 말들과 몸짓의 사이에 드러나는 푸른 징후들. 서먹할 리밖에 없는 우연 혹은 인연의 끈. 슬픔이 슬픔을 알아보고 사랑이 사랑을 알아보듯 징후 또한 비슷한 증상의 서로에게 노출되게 마련인가 보다. 카메라 뒤와 카메라 앞에 상호 주체적으로 양립한 사진가와 모델은 저항에서 투사로, 전이로 이어지며 억압당하던 것들의 구조를 발견하게 된다. 촬영을 마친 후 사진가는 잉여물로 남고, 모델은 자기를 비우며 떨어져 나온 사진이 '푸른 방' 시리즈이다. 그들은 앞뒤, 위아래, 좌우도 없는 무질서한 이야기들 속에서 불가사의한 영역에 머물렀을 것이다. 세계의 분열을 자기의 분열로 받아들이는 것, 자기를 비우면서 타자를 받아들이는 것, 로고스로부터 밀려난 파토스를 불러들이는 것. 이것이 차경희와 모델의 푸른 방 안에서의 여정이 아니었을까. 한 낮의 그림자와 얼룩이 곰팡이 꽃처럼 피어난 '푸른 방'이 아름다운 이유이다.

차경희_푸른 방03_피그먼트 프린트_66×100cm_2014

그렇다면 '하얀 집'에서는 반대로 사진 속의 사람들이 관객을 응시한다. 사회의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하는, 추방당한 얼굴들이 다시 세상을 향해 사진 속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그대로 내친다. 세계의 분열을 아랑곳하지 않는 저 시선들은 관객의 응시를 좌절시킨다. 하셀 카메라로 촬영하며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려고 해도 거리는 무너지기 일쑤다. 경험을 넘어선 이미지다. 얼굴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만 이해의 사각지대이기도 한 이 얼굴들은 의미의 맥락에서 탈각되었기에 멜랑콜리하다. 평안과 불안 사이의 망설임,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명명할 수 없는 얼굴들로 가득 차 있다. 시대의 우울은 다양한 형태로 한국 사회에 발아된 억압과 폭력의 구조를 반영한다. 무겁고 우울하게 사회와 영원히 불화할 수밖에 없는 '하얀 집'의 사람들에게 직선의 시간은 꺾이고 만다. 다만 지금보다 한참은 어렸을 차경희의 시선이 셔터의 열림과 닫힘을 확고하게 측정하는 직선의 시간에 가깝다. 이처럼 '하얀 집'에서 타자의 그림자가 작가에게 멜랑콜리의 기표였다면, '푸른 방'은 멜랑콜리의 징후들로 무한히 재귀하는 특이한 시간을 보여준다. ● 한낮의 밝은 질서 속에서 사진은 탄생했다. 하지만 그것은 역설적으로 자신을 텅 비워 어둠을 유지해야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결핍(부재)에서 출현하는 사진 이미지는 탄생부터 멜랑콜리하다. 부재를 받아들여야 하고, 부재를 통해서야 대상의 실재가 담보되기 때문이다. 실재에 닿으려는 몸짓, 이것이『시대의 얼굴, 멜랑콜리』展을 통해 차경희가 기입하려는 욕망이 아닐는지. 그러니 각기 다른 작품, 각기 다른 인물들이 서로를 거울처럼 비추는 '푸른 방'과 '하얀 집'에서 누군가와 대화하고 싶다면 다소간의 어지러움을 감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작가가 개시한 '사진-삶-사랑-애도'로의 여정은 쓸쓸함과 함께할 때 비로소 보이기 때문이다. ■ 최연하

차경희_푸른 방04_피그먼트 프린트_66×100cm_2014

사진도 죄가 많다-빛, 혼 그리고 멜랑콜리에 대하여 - 1. 사진과 멜랑콜리 ● 폴 발레리에게 혼은 어린아이다. 이 아이는 평생 동안 성장하지 않는다. 혼은 그래서 죽을 때까지 아이처럼 명랑하고 쾌활하고 천진하다. 그런데 이 혼도 상처를 받는다. 멜랑콜리란 무엇인가. 그건 상처받은 혼들의 이름이다. 그런데 누가 이 혼들에게 상처를 주었을까. 그건 어른이고 이 어른의 원조는 플라톤이다. 플라톤에게 혼들은 천진스러운 아이가 아니라 동굴 속에 숨어 사는 위험한 귀신들이었다. 그것들은 '국가'에서 추방되어야 했다. 유명한 플라톤의 '동굴 우화'는 이 추방당한 귀신들, 상처받은 혼들, 그러니까 멜랑콜리 인간족의 기원사로 읽어야 더 맞다. 플라톤에게 인간은 두 종류로 분류된다. 동굴인간과 태양인간이 그들이다. 모든 분류는 불안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을 동원하자면, 플라톤은 이데아 철학자가 아니라 불안신경증 환자라는 게 더 옳다. 그는 말하자면 밀실공포증 환자다. 그는 동굴을 참지 못한다. 그래서 동굴을 수색해서 동굴인간들을 잡아내어 추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수색과 추방의 무기가 다름 아닌 빛이다. ● 사진도 빛이다. 사진은 19세기 산업혁명의 자궁에서 태어난 플라톤의 적자다. 사진은 태어날 때부터 혼들을 수색했다. 사진가들은 혼들을 추적하고 포획하는 수색대였다. 범죄의 혼들을 추적했던 베르티옹이 그렇고, 광기의 혼들을 수색했던 알베르 롱드가 그렇고, 살 속에 숨은 뼈의 혼들을 잡아내려는 X-ray마저 그렇다. 사진은 파죽지세로 승리했고, 플라톤이 꿈꾸던 빛의 국가는 사진의 제국으로 마침내 실현되었다. 그러면 동굴은 사라진 걸까. 아니 동굴은 사라지지 않는다. 촛불의 동굴 대신 카메라의 동굴, 사진의 동굴로 변태되었을 뿐이다. 그러면 혼들은? 혼들도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멜랑콜리의 혼들이 되어 빛의 동굴, 사진의 동굴 어딘가에 바퀴벌레처럼 숨어 있을 뿐이다.

차경희_푸른 방06_피그먼트 프린트_66×100cm_2014

2. 사냥과 호명 ● 그리하여 혼들의 사냥도 여전히 계속된다. 둘러보면 멜랑콜리를 주제로 하는 사진들이 점점 늘어난다. 그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이 현란하고도 차가운 디지털의 동굴 세상에서 우울하지 않은 이가 누가 있을까. 사진이 우울해지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그 우울한 사진들은 어쩐지 시끄럽다. 울기, 몸부림치기, 이불에 얼굴 파묻기, 칼 들기, 두 손으로 얼굴 감추기, 손가락 펼쳐서 사이로 노려보기... 슬픔과 우울 혹은 광기의 시각적 기표들은 소란스러워도, 그 기표들이 가리키는 곳에는 정작 멜랑콜리도 혼도 없다. 왜일까. 기호들은 코드다. 코드가 없으면 기호들도 작동을 못한다. 마찬가지로 기호들이 작동하면 이미 코드가 작동한다. 코드는 시끄럽다. 코드는 소유하려 하기 때문이다. 소유란 무엇인가. 그건 타자 대신 자기를 드러내려는 욕망이다. 이 욕망은 동시에 타자를 영토화하고 식민지화하려는 권력에의 욕망이다. 시끄러운 건 이 욕망과 권력 때문이다. 그러면 사냥을 멈추어야 할까. 영토화를 그만두고 소유 대신 무소유의 윤리를 지켜야 할까. 하지만 벤야민은 말한다. 혼들이 사진을 부른다고, 자기 이름을 호명해달라고 사진에게 간곡하게 요청한다고... ● 차경희의 사진들도 코드를 따르고 있다. 공간과 인물들의 이분법적 구획이 그렇다. 우선 프레임 공간이 병동과 침실로 구획되어 저마다의 명칭으로 경계화된다(하얀 집 vs. 푸른 방). 구획된 공간 안에서 인물들은 더 디테일하게 구획된다. 성이 구획된다. 하얀 집의 사람들은 혼성이지만, 푸른 방의 인물들은 단성, 여자들뿐이다. 존재 방식도 구획된다. 전자는 복수이지만 후자는 단수로 존재한다. 의상도 구획된다. 유니폼의 획일성과 개별적인 실내복의 취향성이 그렇다. 심지어 포맷과 색마저 구획된다. 흑백 하셀블라드의 포맷과 디지털 D800 컬러 포맷이 그렇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응시하면 명백한 이분 구획법은 모종의 전략성을 안에 숨기고 있다. 왜냐하면 시각적으로 자명한 오버-그라운드의 구획성에도 불구하고, 프레임 공간 안에는 이 구획적 코드를 탈코드화시키는 모종의 언더-그라운드 공간이 또한 잠재하기 때문이다. 그 공간은 신체적 표현의 공간, 인물들이 드러내는 포즈와 시선이다. 하기야 이 신체적 환유들마저 얼핏 보자면 역시 코드적이다. 예컨대 병동 사람들의 포즈와 시선은 집중적이고 관음적이다(그들은 웅크리고, 팔짱 끼고, 엎드리고 책상다리 하면서 노려보고, 훔쳐보고, 탐색한다). 반면 침실 여자들의 포즈와 시선은 무기력하고 분산적이다(그들은 모두 침대에 앉거나 누워서 어쩐지 지쳐 있고, 시선의 초점 또한 무목적적이고 공허해서 소실점에 닿지 못한다). 하지만 이 익숙한 기호들의 구획성을 내파시키는 어떤 것이 있다. 그것은 강렬함(intensity)이다.

차경희_푸른 방07_피그먼트 프린트_66×100cm_2014

강렬함은 자체가 사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임박한 사건의 징후이기도 하다. 강렬함은 하얀 집에서는 직접적으로 발현되지만 푸른 방에서는 잠재적으로만 누설된다. 주목해야 하는 건 그러나 이 잠재성이 다른 방식으로 강렬함의 직접성을 점화시킨다는 사실이다. 푸른 침실 곳곳에 박혀 있는 소도구들을 응시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책과 십자가, 구두와 파우치, 꽃과 부적, 나비와 인형, 헤쳐진 여인의 검은 머리칼, 늘어진 연초록 초엽, 달고도 차가운 빙수더미... 푸른 방의 사진 공간 안에서 인물들의 그림자처럼 동반되는 이 소도구 표식들은 다양하지만, 그것들은 모두가, 적어도 내게는, 또 하나의 소도구 표식인 워홀의 노란 바나나 이미지로 수렴된다(바나나는 성 상징이고 노란색은 광기의 색깔이다). 사진 프레임 안에서 소도구는 단순한 액세서리가 아니다. 그건 사진을 운명적 침묵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언어이고 목소리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노란 바나나로 수렴되는 소도구 표식들은 사진 속 인물들의 침묵에게 언어, 아니 외침을 준다(소도구는 때로 비명을 지른다). 벙어리처럼 입 다물고 먼 곳만을 응시하는 침실 여자들의 무력한 차가움이 사실은 뜨거움, 모종의 이유 때문에 타오를 수 없는 뜨거움이라는 걸 대신 외쳐준다. ● 하지만 그 외침은 시끄러운 외침이 아니다. 그 외침은 침묵을 깨지만 그러나 조용하게 외친다. 차경희의 사진이 여타의 사진들과 나름의 차이가 있다면 그건, 적어도 내게는, 이 '조용함'이다. 조용함이란 무엇인가. 그건 침묵과 비명 사이의 어떤 목소리다. 조용한 목소리는 자기가 직접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 감히 대신 말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다만 언어가 없는 것들에게 언어를 빌려줄 뿐이다. 이 언어는 조용하지만 그러나 사건을 일으킨다. 그 사건이 모든 구획, 분류, 경계, 격리들을 허문다. 병동과 침실, 정상과 비정상, 하얀 집과 푸른 방 사이의 경계를 허문다. 그럼으로써 분리되고 격리되었던 것들이 일종의 몽타주 공간 안에서 합류한다. 에이젠슈타인의 몽타주 공간에서 인간의 얼굴과 사물의 얼굴이 용해되는 것처럼 하얀 집과 푸른 방은 차경희의 조용한 공간 안에서 해후한다. 추방된 혼들, 외로운 혼들이 서로를 알아본다.

차경희_하얀 집09_피그먼트 프린트_80×70cm_2002

3. 포토그래피와 스키아그래피(Skiagraphie) ● 그리스 사람들은 두 개의 이미지를 알고 있었다. 하나는 빛의 이미지, 포토그래피이고, 다른 하나는 스키아그래피, 그림자 이미지다. 그림자는 그리스인에게 어둠이 아니었다. 그건 또 하나의 빛, 다른 빛이었다. 밝은 빛이 태양처럼 선명한 빛, 또렷한 언어라면, 그림자의 빛은 촛불처럼 조용하고 어스름한 빛, 침묵의 이미지였다. 그 빛 안에서만 혼들은 포획되지 않고 상처받지 않으면서 자신의 모습을 간직할 수 있다는 걸 그리스의 동굴인간은 알고 있었다. 사진은, 특히 이 시대의 사진은 누구의 적자이어야 할까. 플라톤일까, 동굴인간일까. 사진은 빛이고 빛은 혼이다. 혼은 우울하고 우울한 혼들은 서로를 알아본다. 그리고 사진도 알아본다. 사진은 죄가 많고 그래서 우울한 매체이기 때문이다. 멜랑콜리는 사진의 대상이 아니라 사진의 본질이다. 그러나 잘못된 세상에서 본질은 언제나 왜곡된다. 시끄러움과 소란함의 도구가 되어버린 포토그래피의 시대와 맞서 조용하고 말없이 스키아그래피에 기대고 머무는 일은 힘들고 고독한 일이다. 그러나 사진은 그 수고를 승인하고 껴안지 않으면 안 된다. 스키아그래피, 그것은 사진의 얼굴이며 이 시대 혼들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 김진영

차경희_하얀 집10_피그먼트 프린트_80×70cm_2002

푸른 방 ● 자기만의 고유한 슬픔을 지시할 수 있는 기호는 없다. 이 슬픔은 절대적 내면성이 완결된 것이다. 그러나 모든 현명한 사회들은 슬픔이 어떻게 밖으로 드러나야 하는지를 미리 정해서 코드화했다. 우리의 사회가 안고 있는 패악은 그 사회가 슬픔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롤랑바르트_'애도일기' 중에서) ●「푸른 방」시리즈는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지극히 평범한 여자들을, 그녀들의 침대 곁에서 찍은 사진이다. 안식처이자 안전지대이면서 가장 내밀한 삶을 드러나는 그녀들의 침대 방에서 정상적인 사회성을 드러내고자 외출복을 입도록 요구하였다. 그러고는 그녀들이 자주하는 포즈를 취하게 한 다음, 그녀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나눠가며 환경에서, 혹은 살아온 경험에서 나오는 그 사람만의 고유한 표정과 포즈를 발견하고자 하였다. 롤랑바르트가 '누구나 자기만이 알고 있는 아픔의 리듬이 있다'라고 '애도일기'에서 언급했듯이, 나는 멜랑콜리를 슬픔에 빠진 상태로 정형화하지 않으려 했다. 사진 속 대상들의 공간에서 발견한 오브제와 그녀들이 살아온 삶을 통해 그들 자신도 미처 인식하지 못한 채 나오는 고유의 표정과 몸짓으로 표현되는 멜랑콜리의 기호를 발견하였다. 나는 슬픔의 상태에 빠져 마음이 점점 메마름에서 삭막함으로 변화하고,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무감각해지며, 무기력한 생활에 빠져 지내는 것을 오랜 시간 동안 지속해왔다. 내게 있어 멜랑콜리는 슬픔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고 풀어내지 못해 에너지가 안으로 고인 상태이다.「푸른 방」의 의미는 이처럼 붉은 열정이 푸른 열정이 되어 슬픔이 마음 안에 고여 있는 상태를 뜻한다. ● 현대인은 끊임없이 자기 계발을 하며 지적 감각과 세련됨이라는 무기로 교양화되었다. 자신을 아름답게 가꾸는 미적 감각과 더불어 합리적 이성 또한 발달되어 모든 것을 잘 관찰하고 감정을 제어하는 능력 또한 갖췄다. 자신을 방어하는 기술도 뛰어나 예민하거나 본능적인 감정들은 억누르고 기계처럼 다루려 해서 우리의 감각은 갈수록 단순화되며 둔탁해지고 있다. 그리하여 육체의 감각은 점점 딱딱해져 가고 정념은 갈 곳도, 설 곳도 없이 푸른 방에 고요히 머물러 있다.

차경희_하얀 집12_피그먼트 프린트_80×70cm_2002

하얀 집(정신요양원) ● 나의 서른 살, 알 수 없는 이끌림으로 중심의 삶에서 밀려난 사람들을 사진으로 담았다. 사진을 찍었던 당시에는 '다큐멘터리 사진은 세상을 향해 사회 저변에 있는 사람들을 대변할 수 있다'라고 굳게 믿었지만, 얼마 안 되어 사진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음을 바로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나를 바라보며 하는 '외침'과, 사진에 찍힌 그들의 절실한 눈빛을 대면하면서 내가 왜 찍었는지, 무엇을 바꿀 수 있는지 그리고 내 사진적 행위의 정당성은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지 못하여 불편한 마음이 자리 잡혔다. 그렇게「하얀 집」은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12년이 흘렀다. ●「푸른 방」과「하얀 집」을 연결 지으면서 자연스레 내가 그들의 삶의 주변을 왜 맴돌았는지 알게 되었다. 그것은 내 안에 근원 없는 절망, 혹은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허함이 늘 자리 잡혀 있기 때문이었다. 슬픈 사람은 슬픈 대상들을 쉽게 알아보고, 그들의 슬픔에 쉽게 도취된다. 왜냐하면 그들의 모습에 내 모습이, 그리고 우리의 모습이 투사되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내 안의 슬픔으로, 늘 다른 사람의 슬픔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제 나는 사진으로 그들의 삶을 대변할 수 없다는 것에 얽매이지 않는다. 다만「하얀 집」사람들과「푸른 방」여자들로 구성된『시대의 얼굴, 멜랑콜리』展을 통해, 그들의 경계 없는 시선과 마주함으로써 그들과 우리가 다르지 않음을 사진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다. ■ 차경희

Vol.20141126a | 차경희展 / CHAKYOUNGHEE / 車慶姬 / 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