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연 유작전

김부연展 / KIMBOOYEON / 金富淵 / painting   2015_0128 ▶ 2015_0210 / 월요일 휴관

김부연_닭과 호랑이_캔버스에 유채_53×65cm_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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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5_0128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팔레 드 서울 gallery palais de seoul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10길(통의동 6번지) 이룸빌딩 Tel. +82.2.730.7707 palaisdeseoul.com blog.naver.com/palaisdes

아이와 유희의 미학 ● 김부연은 아이의 세계를 추구한다. 파리에서 긴 시간동안 현대미술을 전공한 작가가 결국 도달한 지점은 순수와 가벼움의 미학이다. 그의 작품은 아이 그림을 추구했던 기존 작가들에 비해 훨씬 더 밝고 경쾌하며 긍정적이다. 작가는 그림을 억누르는 모든 무거운 요소들(지식, 문화, 이념, 감정 등)을 걷어낸다. 작품에서 형태는 극도로 단순하며 선은 서투르고 투박하다. 색은 밝은 원색이며 입체감은 파괴되었다. 역설적이다. 프랑스에서 난해한 미학, 미술사적 개념들과 오랫동안 씨름했던 작가는 그것들로부터 오히려 탈출하고자 한다. ● 작가의 모티브는 아이들의 낙서 그림이다. 작가는 아이들이 그리는 낙서라는 단순한 '행위'에서 자신의 모든 미술의 근원을 발견한다. 작가의 질문은 미술의 원초적인 지점을 향한다. 인간은 왜 '그리는' 것일까. 인간의 최초의 그리기는 마치 아이처럼 장난스러운 어떤 행위, 알 수 없는 감정의 무의식적인 풀어놓음, 즉 단순한 '놀이'에서 출발하지 않았을까.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현대미술은 현재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난해한 개념과 어려운 철학적, 미학적 이론에 파묻힌 현대미술은 모든 창작 행위의 출발인 놀이와 즐거움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김부연_소녀_캔버스에 유채_73×60cm_2011

이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김부연은 자신의 작품론의 핵심을 '놀이' 혹은 '유희'라는 두 개념으로 정리한다. 작가는 지식과 개념 혹은 추상에 사로잡힌 서양의 현대미술은 미술이라는 예술장르의 근원을 잃어버렸다고 비판한다. 회화라는 공간은 소위 '교양인'이 자신이 일생에서 습득한 모든 지식과 경험을 고민해서 풀어놓은 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모든 교양을 떨쳐버리고 난해한 사유에 사로잡히지 않으면서 한바탕 즐겁게 판을 벌이는 '유희의 공간' (김부연의 박사논문의 제목에서 따왔다. 프랑스 파리 8대학 조형예술학과 박사논문「회화의 공간, 유희의 공간(L'espace pictural, l'espace ludique)」(2007).)이다. 그에게 진정한 회화는 '놀이로서의 회화' (김부연의 석사논문의 제목에서 따왔다. 프랑스 파리 8대학 조형예술학과 석사논문「놀이로서의 회화(La peinture en tant que jeu)」(2000).)인 것이다. ● 김부연의 이 같은 미학관에 영향을 준 작가는 파울 클레(Paul Klee)이다. 클레는 자신의 예술관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미술관이 예찬하는 화가에 만족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상대로 노력하고 싶다. 내가 보기에는 예술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오히려 민속학 박물관이나 아이들 방에서 볼 수 있다." 클레는 미술사의 대가 혹은 당시 저명한 화가의 그림에는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왜냐면 그들의 세련되고 섬세하게 정제된 작품에는 클레가 원하는 '예술의 근원' 혹은 '예술의 출발점'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클레는 오히려 기존의 미술사가 주목하지 않는 분야인 민속학적 맥락에서 제작된 것들이나 아이들 그림에서 예술의 원형을 찾고자 했다.

김부연_닭_캔버스에 유채_27.5×22cm_2010

김부연도 그가 유학했을 당시 프랑스에서 유행했던 최첨단 현대미술을 거부하고 아이들 그림에서 자신의 모든 미술의 원칙을 찾는다. 왜 하필 아이들의 그림일까? 그것은 작가가 생각하는 예술의 근원은 '놀이'인데 미술에서 놀이의 가장 순수한 형태가 아이들이 즐겨하는 그림 놀이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원시시대에 한 인간이 나뭇가지로 흙에다 무심코 그리는 행위, 원시 부족이 특별한 이유 없이 놀면서 추는 춤과 노래가 예술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저 까마득히 오래된 과거에 탄생했던 예술의 근원이 현대에는 아이들이 아무 생각 없이 그림을 그리는 단순한 행위에 남아있다는 것이다. ● 아이의 그림은 왜 예술의 근원을 담고 있을까? 그것은 우선 아이가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특별한 목적과 의도에서 출발하지 않고 '행위 자체의 즐거움'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화가는 그림을 그릴 때 자신이 지금까지 배웠던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작품을 제작한다. 게다가 그는 기존에 자신이 그렸던 그림들에 나타난 공통분모를 지키고자 하며(일관성의 원칙), 새로 그린 그림을 전시했을 때 미술제도(컬렉터, 비평가, 관객 등)의 반응을 미리 생각하면서 그린다. 하지만 김부연에게 이 같은 작품 제작 행위는 예술의 근본적인 정신인 유희 혹은 놀이가 아니라 오히려 고통이자 힘겨운 노동이다.

김부연_다리풍경_캔버스에 유채_91×116.5cm_2010

김부연은 창작 행위에서 '관점'을 조금만 바꾸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고 생각했다. 어른이 아니라 아이의 시선을 취하면 미술의 원형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아이는 그림을 그릴 때 교양의 무거움에 억눌릴 필요가 없으며 관객이나 비평가의 눈치를 살필 필요도 없다. 아이는 심지어 자신의 예술관 자체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그냥 '노는' 것이며 오직 그림을 그리는 즐거운 행위일 뿐이다. 아이의 그리는 행위는 예술가의 무겁고 심각한 행위와는 다른 가볍고 경쾌한 행위이다. 이런 행위를 통해 제작된 작품은 그림을 그리는 주체의 내면을 가장 투명하고 솔직한 형태로 반영한다. ● 아이들의 그림은 반(反) 문화적이다. 그것은 최초의 그림(원시 미술)이자 최후의 그림(아방가르드 미술)이기도 하다. 그 사이에 모든 미술의 역사가 놓여있다. 아이들의 그림에는 기존 회화의 모든 기법이 파괴되어 있다. 거기에는 또한 현대 미술가들이 이룩한 새로운 업적들이 '이미' 내재되어 있다. 아이들은 문명의 코드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이 세계를 하나의 시점에서 재현하는 원근법의 세계관에서 벗어난다. 아이들은 하나의 시점이 아니라 다양한 시점을 한 화면에 투영한다. 이들에게는 오히려 특별히 고정된 시점이 없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그 만큼 아이들이 이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은 고정되지 않고 부유하며 체계적이지 않고 무질서하다. 하지만 아이들은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대상의 형태를 가장 잘 드러내는 시점들을 채택한다.

김부연_사자_캔버스에 유채_60.5×72.5cm_2009

김부연은 아이들의 이런 원시적인 혹은 전위적인 회화 기법을 차용한다. 예컨대 작가는 원근법의 단일 시점을 파괴하여 사자를 그릴 때 사자의 얼굴은 정면으로 몸은 측면으로 배치한다(「까치 호랑이」(2011)). 그것은 합리적인 시점에서는 불가능한 재현이다. 사자의 갈기는 밑으로 처져있지 않고 둥근 원처럼 퍼져있다(「사자」(2010)). 그것은 사자의 모든 요소를 가장 잘 드러내기 위해 작가가 다양한 시점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동물연작 시리즈인 닭을 그린 그림(「집과 닭」(2008)에서 작가는 집과 닭을 함께 그렸는데 집 위의 올라가 있는 닭은 괴상할 정도로 집만큼 크다. 작가는 대상을 '어른의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상상'에 따라 그렸기 때문이다. 작가는 대상을 눈으로 혹은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혹은 환상의 눈으로 그린다. 아이의 마음으로 닭과 집을 바라보면 닭이 집에 비해 크기가 아무리 작을지라도 아이의 마음에는 동일에게 다가온다. 이런 측면에서 김부연의 작품은 아이의 그림일 뿐 아니라 '마음'의 그림이기도 하다. 이러한 마음의 기발한 상상은 어른의 세계관의 틀을 일찍 감치 벗어난다.

김부연_나무와 새_캔버스에 유채_80×100cm_2007

작가의 손은 아이의 무심한 손이다. 작가의 손놀림은 아이의 낙서처럼 자유롭고 경쾌하다. 그 손은 기존의 의미에서 예술적 의도 혹은 예술 작품이 되고자 하는 의도가 없으며 따라서 그 손은 거침이 없다. 어른의 손놀림은 전문가의 손처럼 능수 능란 하지만 고민하고 주저하며 무겁다. 그 손은 예술적, 문화적, 제도적 의도들에 구속된 손이며 무언가를 힘겹게 '지향'하는 손이다. 하지만 김부연의 손은 다양한 의도라는 구속에서 해방된 손이다. 작가의 손이 화면에 만들어 놓은 조형 요소(선, 형태, 색)는 주저함이 없으며 자유분방하다. 이러한 조형 요소는 화면(웃고 있는 인물, 동물, 유럽 풍경 등)에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는다. 화면에서 섬세하고 치밀한 구성은 작가의 관심이 이미 아니다.

김부연_새를 먹는 아이_캔버스에 유채_45×33cm_2004

질서, 의식, 의도의 굴레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선-색-형태 때문에 김부연의 그림은 장 뒤뷔페(Jean Dubuffet)의 작품처럼 '서툴게' 보인다. 예컨대 그림에서 선을 자세히 보면 선은 형태에서 자주 빗겨나 있다. 작가는 곧은 직선보다는 비틀거리는 직선을 사용한다. 한번 그은 선에 선을 여러 번 긋기도 한다(「세느강변」(2009)). 작가는 색을 배합하는데 신경을 쓰지 않는다. 작가는 가는 붓을 사용하여 형태를 정확하게 재현하는 대신에 커다란 붓을 사용하여 몇 번의 터치로 형태를 주먹구구식으로 만들어 나간다. 그의 작품「닭」(2010)을 보면 닭의 몸통은 다섯 번의 붓 터치로 간략히 처리되었다. 이처럼 정제되지 않은 거친 붓 터치는「닭과 호랑이」(2011)에서 절정을 이룬다. 반 고흐의 붓 터치를 연상시키는 이 그림에서 작가는 태양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거대한 터치로 배경 화면에 가득 채웠다. 이러한 커다란 터치는 같은 작품에서 호랑이 위에 올라선 닭의 꼬리를 그릴 때도 그대로 나타난다.

김부연_가족_캔버스에 유채_72.5×116cm_2003

김부연의 서투른 미학과 아이의 미학은 현대미술이 이룩한 정신이다. 그 정신이 추구한 것은 기존의 미술양식과 현대문명에 대한 저항이다. 현대미술은 인간이 오랫동안 쌓아놓은 문명과 이런 문명에 기반을 두고 탄생한 전통적인 미술의 모든 성과를 거부하고자 한다. 현대미술은 어쩌면 아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무언가를 그리는 최초의 행위로 다시 돌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측면에서 김부연의 작품은 가장 반(反)-문화적, 반(反)-문명적, 반(反)-미학적이다. 그것은 문화, 문명, 예술. 미술의 코드에 때 묻지 않은 시원(始原)(원시미술, 민속학, 무의식, 아이)을 갈망한다. 작가는 결국 아동미술의 코드를 통해 미술의 근본을 다시 사유하고 있다. ■ 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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