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수집

정규형展 / JEONGGYUHYUNG / 鄭圭炯 / painting   2019_0208 ▶︎ 2019_0226 / 일요일 휴관

정규형_57:31:19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목탄_130.3×300cm_2019

초대일시 / 2019_0208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02:00pm~06:00pm / 일요일 휴관

살롱 아터테인 SALON ARTERTAIN 서울 서대문구 홍연길 32(연희동 708-2번지) Tel. +82.(0)2.6160.8445 www.artertain.com

삶이 가장 빛나고 있을 때, 그림자는 가장 어두워진다 ● 뭔가 복잡한 상황들의 전개과정을 한눈에 펼쳐보고자 할 때, 그 과정의 결과로 발생하는 수 없이 많은 단서들을 시간 별로, 혹은 공간 별로 나누어 벽이나 보드에 붙이고, 각 과정의 연관관계를 분석한다. 일종의 혼자 하는 브레인스토밍인 셈이다. 서로 다른 결과들의 공통점들이 이어지면서, 복잡하게만 보이던 상황들이 하나의 이야기로 집중되기 시작한다. 그 순간, 모든 단서들에는 저마다의 작은 이야기들이 생겨난다. 그 이야기들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들.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명확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단서들. 그리고, 그 단서들을 수집하고, 기록하는 것. 막연하나마 서로의 연관관계를 찾을 수 있을 것에 대한 믿음. 복잡한 상황은 그 상황을 만들고 있는 모든 단서들의 기록과 수집이 많아 지면서 생겨나는 것이라면, 결국, 복잡한 상황은 생각의 흐름이 시각적으로 명확히 보이지 않은 채, 꼬리를 물고 나타나는 단서들의 작은 이야기들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규형_13:0:13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6.8×91cm_2019
정규형_6:5: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목탄_90.9×72.7cm_2019
정규형_9:6:3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7×60.6cm_2018
정규형_5:3: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목탄_60.6×50.0cm_2019

해서, 정규형 작가는 자신의 드로잉을 큐로잉으로 부른다. 질문, Question과 드로잉, Drawing을 합쳐서 만든 조어다. 말 그대로, 그에게 있어 드로잉은, 주변의 궁금한 이야기와 보여지는 여러 상황들에 대한 시각적 자료 수집인 셈이다. 그렇게 수집된 자료들은 작가의 매일의 의식들을 반영하고 있다. 일기처럼 써 내려간 그의 드로잉들은 계속해서 벽에 붙는다. 도저히 지난 드로잉들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그의 드로잉이 붙여지는 벽은 아주 두껍게 드로잉 레이어가 쌓인다. 어려서 아버지의 수집벽으로 인해 많은 불편을 느꼈음에도, 자연스럽게 작가의 몸에 벤 수집벽. 신문 기사 하나 마음대로 버리지 않고, 벽에 붙여 놓으셨던 아버지와는 다르게 그는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드로잉으로 그려서 붙인다는 것. 즉, 단순한 수집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동시대의 기록인 셈이다.

정규형_7:3:3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목탄_65.1×80.3cm_2019
정규형_7:5: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6×60.6cm_2018
정규형_3:3: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목탄_60.6×50cm_2019

정규형은 유년시절, 만화를 통해 시각을 언어화 하는 방법론을 스스로 배웠다고 한다. 물론, 문학이나 인문학과 같은 서사와 이야기 구조가 있는 경우 이를, 시각화하기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만화는 여전히 출판, 문학, 영화의 영역을 두루 다 소화할 수 있는 마술 같은 장르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만화는 출판산업과 같은 직접적인 경제활동이 필요해 지면서, 자극적인 내용이나 그림들로, 예술 장르로 평가하기에는 여전히 대중문화적인 느낌이 훨씬 세다. 여하튼, 작가는 스토리텔링이 명확한 만화적 시각을 통해 자신의 시각적 언어를 내러티브가 있는 구조로 만들어 낸 것은 정규형만의 탁월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 따라서 작가의 드로잉은 다양한 변신을 하게 된다. 즉, 작가 자신이 겪게 되는 다양한 일상들이 드로잉이라는 형식으로 바뀌거나 합쳐지게 된다. 보이는 것들을 그대로 그릴 것인가, 아니면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이면의 이야기를 더 분석하고 나서 그려야 할 것인가. 드로잉 자체가 의문인, Q'rawing, 씹고 단맛이 다 빠지면, 처치 곤란한 쓰레기로 전락하는 츄잉껌에 그려진 드로잉인, Chew'rawing과 같이 작가에게 드로잉은 늘 자신의 주변을 바라본 느낌들을 기록하는 일종의 자기 만족적인 행위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수집해 놓아야만 삶의 불편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루하지만, 꼭 반복되어야만 하는 삶의 태도인 것이다.

정규형_2:2:0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목탄_60.6×50cm_2019
정규형_Q'rawing_종이(캔버스)에 유채, 목탄, 아크릴채색, 펜_가변설치_2012~9

기록과 수집 행위의 반복으로, 벽에 두껍게 쌓여진 드로잉 레이어들. 결국, 예전의 기록들은 매일 새롭게 수집한 기록들로 가려지고, 잊혀져 간다. 그리고, 간간이 새롭게 수집되는 드로잉들 사이로 빼꼼하게 드러나는 오래된 기억이자 기록인 드로잉들. 어쩌면 그 중첩들로 인해, 과거의 기억들이 쌓여, 현재의 사건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 한번의 큐로잉을 해보게 된다. 작가에게, 드로잉의 중첩은 일종의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의식적인 행위이면서, 또 다른 의미로, 반복되는 삶 속, 매일 조금씩 변화되는 자신과 주변의 관계를 세밀하게 관찰하여 기록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잔뜩 붙여진 지금의 기록, 즉 드로잉 사이사이로 보여지는 예전의 기록들… 그리고, 물리적으로 겹쳐 보이는 드로잉들 말고, 정신적이고, 개념적으로 전이된 사건과 기억들. 어쩌면 작가에게 이 행위와 결과들은, 이미 지나간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완전히 뒤섞여 사진으로 찍어 기록되듯이, 평면화 된다. ● 그리고, 정규형은 그 평면화된 기록들을, 캔버스에 옮긴다. 세상에서 가장 빛났을 것 같았던, 시절도 지나고 나면, 희미한 웃음 정도로 기억되듯이, 죽을 만큼 힘들었던 시절도 역시 지나고 나면, 오히려 더 껄껄 웃을 수 있는 나만의 소중한 기억이 되고, 추억이 된다. 중첩되어 쌓이는 작가의 기억과 그 기억을 대변하고 있는 기록들, 즉 드로잉들은 그 자체 대상이 되어 작가의 캔버스에 다시 그려진다. 이는, 작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각각의 드로잉들이 하나의 커다란 이야기 틀 아래로 뭉치고, 조직화 되는 과정이다. 오히려, 일상을 기록해 왔던, 작가의 소중한 시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자체가 용납되지 않는 성향의…) 의미 있는 시간으로 바꿀 수 있었던 작가만의 행위. 즉, 매일을 만화의 한 프레임처럼 주어진 화폭에 하나씩 담고 있다는 것. 을, 전체 큰 줄거리가 생겨나는 이야기로 치환하는 작업. 그렇게 두껍게 붙여진 작가의 드로잉들이 브레인스토밍이 되는 순간 이기도 하고, 아버지의 길고, 고집 센 수집벽적인 습관이 크리에이티브하게 다시 작가에게로 이어져 온 숙명일 수도 있겠다. 지금처럼, 무엇이든 쉽게 결정되고, 반대로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는 시절… 그에게서 보여지는 삶의 작고 빛나는 이야기를 좀 맘 편히 들어 봤으면 좋겠다. ■ 임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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