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의 시간

종근당 예술지상 역대 선정작가展   2019_0503 ▶︎ 2019_0512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참여작가 윤상윤_이우창_이혜인_류노아_심우현_안두신 김효숙_박승예_이만나_안경수_이채영_장재민 김수연_박광수_위영일_유창창_전현선_최선 김창영_서민정_서원미_양유연_유현경_이제

주최 / (사)한국메세나협회 주관 / 아트스페이스 휴 후원 / 종근당

관람시간 / 10:30am~08:00pm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SEJONG CENTER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175(세종로 81-3번지) 전관 Tel. +82.(0)2.399.1000 www.sejongpac.or.kr

고구려의 화가 솔거의 벽화에 새가 날아들어 대가리를 박은 후, 중국의 황제가 벽화 속 물소리에 잠을 설친다고 불평한 후, 그리스의 화가 파라시우스와 제욱시스가 자연과 뮤즈의 눈을 속이는 재능을 경쟁한 후, 회화의 역사는 자연을 향한 귀로(歸路)였고 예술이 곧 자연이라는 이념의 역사였다. 그러나 자연을 모방하는 재현의 역사는 근대 이후 자연의 이념과 아름다움에서 벗어나 인간의 정신과 감정을 주제로 한 예술 활동이 중심이 되면서부터 자연의 모방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수많은 예술의 모험으로 바뀌었다. 과거의 예술과 미의 전통에 대한 전승과 단절이 반복되면서 화가들은 유일한 원형으로서의 자연에서 벗어나 자기 고유의 세계를 만드는 길을 개척해나갔다. 근대 이후 예술가들은 세속과 탈속, 삶과 죽음 사이에서, 한 없이 높이 비상해 현실을 초극하기도 하고 무저갱의 어둠으로 가라앉기도 했다. 한국의 예술가들 또한 근대화 과정의 깊은 좌절과 높은 비상을 모두 경험했다.

1. 우리 시대의 회화를 생각한다. ● 완전히 해결되지도 사라지지도 않은 오래된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회화란 무엇인가? 나는 회화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회화는 어떻게 존재할 수 있고 어떻게 느껴질 수 있는가? 느낄 수 없는, 느끼지 못하는, 느낌을 잃어버린 것들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과거나 미래에는 존재했을지도 모르지만. ● 모두 잠든 깊은 어둠 속 가만히 혼자 있으면 역설적으로 세상의 온갖 존재하는 것들이 점점 더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 비명을 질러댄다. 깊은 어둠이 내면의 밝은 빛을 더욱 밝히듯, 존재가 숨죽이는 시간이 거꾸로 존재하는 것들이 소동을 부리는 시간이 되어버린다. 일상의 상념이 쓰나미처럼 의식의 평화를 침범한다. 어디에서도 우리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으며 결코 고독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고독을 허락하지 않는 세상은 바로 그 이유로 인간이 고독하다는 사실을 비극적으로 표현한다. 회화는 고독한 사람의 세계와 맞닿아 있다. 이 고독은 일상의 감상적 고독을 초극하는 존재론적 의미에서의 고독이다. 본질적으로 창작이란 극히 개인적이며 고독한 활동인 것이다. 작가 개인의 정신과 운명에 더 영향을 받는다. ● 창작 과정에 일군의 화가는 전통을 따르고 또 다른 그룹은 전통을 거부한다. 그러나 이들이 따르거나 거부하는 전통은 같은 것은 아니다. 전통을 따른다는 것은 그 전통의 장점 또는 미덕을 전승하는 것이고, 전통을 거부한다는 것은 그 전통의 단점 또는 시대착오성을 거부하는 것이다. 화가들 저마다의 창조의 관습과 문화적 코드에 대한 수용과 반발의 과정을 통해 시각을 더욱 유연하게 하고 문화의 질과 양을 풍부하게 만든다. ● 회화란 한 작가의 정신과 노동의 몰입과 융합의 결과물이다. 모든 창작의 순간이 정지된 또는 동결된 것은 죽음에 가까운 것이다. 생동하는 창작자의 운동이 점차 소진되거나 갑자기 종결되면 회화의 탄생이란 작가의 창조력의 죽음, 동결인 것이다. 그러나 관객(수용자)은 바로 그렇게 종결된 순간에서 시작되어 확장하는 감응을 통해 작가가 겪은 운동, 경험을 거꾸로 수행하는 것이다. 관객에 의한 새로운 창조적 해석이 벌어지는 것이다. 수용자 미학 또는 열린 예술의 인식이다. 삶 속에 죽음이, 순간 속에 영원이 생동하는 것이다. 회화란 그러한 사유와 존재, 운동과 정지가 교차하는 장소에서 탄생한다. ●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면, 삶을 이어가는 것이 무의미와 무가치한 것이라면, 예술의 존재와 그 가치란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그 크기와 깊이와 세기와 상관없이 의미로 가득한 세계에서만이 우리의 삶도, 예술도, 회화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회화의 존재 자체가 회화의 의미를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시기 많은 미술가들이 있어왔고 무수한 그림이 제작되었다. 그 만큼 수많은 가치와 의미가 생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이상의 많은 작가와 작품이 망각되고 무의미의 영역에 들어서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현실에서 미술사란 기억되는 소수와 망각되는 대다수로 구성되어 있다. 기억의 역사와 망각의 역사를 마치 뱀이 자기 꼬리를 물고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처럼 상상할 수도 있다. 무언가를 기억하면 할수록 역설적으로 망각의 운동이 더욱 강렬해진다. ● 미술사란 정량적으로 보자면 망각의 역사에 더 가깝다. 현재 창작과 전시와 감상으로 촘촘하게 짜여지는 우리들의 각고의 노력과 실천이란 곧 시간 속에 스러져가는 예술의 숙명, 무수한 망각이라는 준엄한 현실에 대한 저항인 셈이다. 알게 모르게 작가들의 감각과 사유와 표현에는 그러한 깊이가 더해지는 것이다. 모든 예술가들은 결국 철저하게 비범하거나 우둔하거나 자유롭다. ● 비물질과 물질, 정신과 노동이 성공적으로 융합하며 펼쳐지는 창조의 순간, 예술가들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창작할 수 있는 순간은 그 예술가에게나 그를 바라보고 증언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나 모두 행복할 것이다. 지나가버린 시간을 감각할 수 있는 형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놀라운 신비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듣고 만질 수 있게 하는 것 또한 마법이다. 오랫동안 그것을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간에 많은 예술가들이 그러한 기적에 몰두했다. 예술가들이 노동을 닮은 창작과 표현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예술가의 마음 또는 정신 속의 사건을 결코 느낄 수도 알 수도 없다. 예술가들은 창의와 상상 만큼이나 표현이라는 창작자의 실천을 동반해야 하고 그 역도 마찬가지여야 하는 것이다. ● 우리는 시간을 초와 분 단위로 계산하며 일상을 조직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시간의 감각은 상대적이며 일종의 환영이라고 주장한다. 예술가들의 시간과 평범한 생활의 시간은 분명 다르게 인지된다. 어린 아이의 시간과 노년의 노인이 느끼는 시간이 다르듯. 현재의 밑에는 과거가 무수히 중층적으로 쌓여있고 미래는 이러한 거대한 과거를 품은 현재들이 나열되며 진행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회화란 이러한 현재들의 집합이고 운동이다. 평범한 현재가 아니라 원형의 기원까지 거슬러 오르는 과거를 품은 현재의 다른 표현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작가들이 표현하는 것은 일상의 기억이나 현재가 아니라 현재와 과거, 미래가 교차하는 어떤 순간이다. 이러한 순간을 다루는 세계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순수예술의 영역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순수란 온갖 사건과 관계로 뒤범벅된 혼합물이기도 하다. 회화는 다른 세계를 발견하는 일이지만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성찰하는 영혼의 여행이자 성장통이다. ● 회화는 어떤 기술적이거나 물리적이고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것을 향한다. 그러므로 실상 우리가 미술관에서 만나는 대가들의 회화들은 관객을 향해 있지만 오히려 그것은 회화의 뒷모습이기 십상이다. 회화는 매번 등 돌린 채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기에 회화의 진짜 얼굴을 보기가 어렵다. 우리가 회화라고 보았고 보았다고 주장한 것은 회화의 얼굴이 아니라 그것이 아무리 화려하고 뛰어난 이미지라 하더라도 결국엔 회화의 뒷모습이다. 회화가 진실에 다가가는 창이고 삶과 진실의 은유라면 가장 감각적인 회화조차 궁극엔 어떤 실재에 도달한다. ● 회화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작가의 현실을 재현하고 있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들이 재현하고 있는 현실이 보편적이며 만인이 공감하고 동의하는 현실인지는 더 많은 시간과 관계, 의미의 비평적 해석의 과정을 거쳐서 드러날 것이다. 회화의 진정성은 각자의 세계와 그들이 공통으로 속한 현실세계가 얼마나 잘 연결되어 있는지에 달려있다. ● 회화는 현실을 쫓는다. 동시에 꿈꾼다. 그리고 표현한다. 회화는 꿈과 현실, 그 사이를 오고가며 재현한다. 수많은 회화이미지에 사람과 삶과 현실과 초현실이 다양한 비율로 배합되어 있다. 우리가 꿈에 쉽게 도취하는 이유는 아무리 행복하고 완전한 현실 또는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현실을 만나더라도 만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완전한 실재(Reality), 이상적 현실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는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욕망과 그 욕망의 충족이 만나는 현실은 초현실 또는 꿈과 붙어있다. 그 맞닿아 있는 경계의 지점에서 우리는 불안하다. 회화는 예술가의 노동을 통해 현실과 초현실을 동시에 포착하려고 한다. 이해하고 공감하려고 한다. 꿈과 환상에 휩싸인 예술가는 아주 용이하게 현실과 초현실 사이를 넘나든다. ● 회화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우리는 그림을 통해 어떤 영감을 받고 성찰하는 사건과 조우할 수 있다. 상처로 고통받는 현실을 잊고 영혼을 치유하기 위한 수단으로 회화에 몰입하기도 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연합국을 승리로 이끈 영국의 수상 처칠은 그림에 몰두했다. 함께 싸웠던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도 그림그리기를 종용했다. 마음에 깊게 새겨진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는데 그림그리기 만한 것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영미권에서는 그림그리기 열풍이 불었다. 세계적으로 동시에 확산된 회화의 대중화였다. 20세기 들어 1, 2차세계대전을 겪은 서구사회에서 영국의 프란시스 베이컨이나 루시안 프로이드의 인물화나 독일의 게오르그 그로츠와 오토 딕스의 인물화, 장 포트리에, 장 뒤뷔페, 미셀 타피에와 같은 앵포르멜 작가들의 작품이 깊은 울림과 공감을 얻은 이유이다. ● 모든 그림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교묘하며 신비로운 힘이 작동하는 회화는 더더욱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기고 밀어내며 움직인다. 이는 간접경험으로는 만날 수 없는 활동과 경험을 말한다. 노동과정에 사유하고 사유과정에 노동하는 이중의 활동이 동시에 벌어지는 것이다. 그림은 벽에 세워 그리거나 아니면 바닥에 놓고 엎드려 그리거나 사람의 신체활동과 하나의 비전을 향한 노동과 사유와 예지가 복잡하게 녹아있는 과정을 반복하게 된다. ● 작가들이 느끼는 어려움은 회화 자체의 어려움이기도 하지만 작가가 붙들고 있는 화두, 그 화두의 난해성 때문이다. 그리는 행위는 무언가 절실한 해답이 필요한 문제를 만났을 때이다. 넓고 깊은 교양과 지식은 붓질 하나 가르쳐주지 않는다. 작가는 점점 더 어려운 문제를 향해 날아간다.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난제와의 투쟁과 갈등은 재료들, 선과 면, 색과 붓질로 형상화 된다. 형상화의 과제는 작가들이 당면한 현실이자 일종의 출구이기도 하다. 문제를 그냥 놓아버리면 되지만 그렇게 되지 않으니 난제이고 딜레마이다. 누구도 작가에게 가르쳐 주지 않는다. 작가는 강한 의지를 갖고 스스로의 눈과 손과 감정과 노동만으로 그려나가야 한다. 그러므로 한 작가가 마무리한 이미지는 경이로운 것이다. ● 현대 회화 분야의 많은 작가들이 존재와 실존의 문제, 자아와 정체성의 문제, 주체와 타자의 문제 등을 전통적인 조형의 어법을 벗어나 보다 형이상학적인 차원으로 접근한다. 이미지는 이러한 존재와 부재 사이의 긴장이 드러나는 표면이다. 현대 회화는 조형의 마술적 경이나 심미적 쾌락을 주는 시대를 해체한지 오래 되었다. 한 작가의 예술활동과 그 결과물은 거의 개인의 독자적 신앙, 제의적 특성을 지니게 된다. 합리적 분석과 상대적 평가란 무의미해진다. 더 이상 어느 작가의 이미지가 더 우수하다거나 더 심오하다는 식의 감상과 평가의 시대는 역사가 되어버렸다. 조형의 경험에서 실존의 경험으로 나아가버렸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많은 작가들과 작품들을 비교하고 평가하는 과거의 관습을 버리지 못한 채 엉거주춤 서있다. 과거와 현재의 회화는 겉모습은 닮았으나 그 본질은 완전히 변화되어버렸다는 것을 알지만 우리의 감각과 감성은 매우 불규칙하게 앞서가거나 아니면 뒤로 물러난다. 진보와 퇴보가 복합적으로 뒤섞인 잡탕 속에서 이들이 집중하는 이미지를 만나는 것이다. 현실은 이질적인 힘과 흐름이 끝없이 충돌하고 섞이는 세계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회화는 스스로 그 내부 또는 그 중심으로부터 해체되고 완전히 과거의 일체를 일소하지 않으면 새로운 세계로 도약하기란 요원하다. 작가는 그 과정을 관통하며 인간의 감정, 개인의 생동하는 감정의 변화를 기록하고, 재현하고 표현한다. 현실을 재현하는 과정에 작가는 자신의 이념과 성찰과 감각과 감정이 분해되고 융합되는 과정을 무수히 겪으며 조금씩 형성된 이미지를 기록한다. 이러한 기록은 단순히 표현이라거나 일루젼이라는 관념으로 머물지 않는다. 어떤 진실과 지혜로 도약한다. 감각적인 것이 궁극엔 개념적인 것과 만나고 가장 개념적인 것이 결국엔 감각과 조우하는 것이다. ● 작가는 고립된 작업실에서 전력을 다한 총체적이며 집중적인 활동을 지속한다. 이러한 과정은 마치 연금술의 진행처럼 질적 비약과 함께 더 생생한 감각과 접촉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강박적이며 자폐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지치지 않고 내면의 세계를 탐구하고 기록하는 것은 탈속적인 활동이다. 내면을 향한 운동은 동시에 인간의 세계를 확장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러한 안과 밖을 동시에 운동하는 창작자들의 창작 행위가 품고 있는 불가사의한 동시성은 근대의 합리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오히려 근대 이전의 물질과 정신이 융합된 상태, 정신활동이 곧 물질의 변화와 운동과 연관되고 그 역도 마찬가지인 세계관을 포함시켜야 한다. 이는 시대의 변화를 집단적이지 않은 철저히 개인적이며 독자적인 활동으로 대응하고 응답하려는 것이다. 개인과 개인, 세계와 세계가 조우한다.

윤상윤_Stardust_캔버스에 유채_91×116cm_2019

2. 화가들윤상윤 작가의 작업은 주로 초현실적 환경을 배경으로 사람들 간의 위계성, 집단과 집단, 소통과 힘의 관계를 드러내는데 집중했다. 이미지는 마치 연극 무대처럼 사람들이 다양한 형태와 조건 속에 배치되어 작가가 성장과정에 경험했던 사적 체험과 사회생활 속에서 경험한 다양한 형태와 세기로 작동하는 사람들 간의 관계를 환상적 분위기로 재구성해왔다. 주로 사적 세계와 공적 세계가 기묘하게 융합하는 연작으로 제작해왔는데, 이는 사건과 이야기가 다시 현대미술의 영역으로 돌아오는 시대의 이미지를 반영한다. 하나의 선적 구성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도 아니고 여러 방향으로 열려있는 다소 모호한 또는 은유적인 이야기 구성을 지니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인물과 사건이 현대미술의 회화의 주요 주제로 복귀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현대미술에서 드라마가 있는 사건과 이야기가 사라진지 오래되었다. 20세기 이후 현대미술은 미술 그 자체의 본질 또는 고유 속성을 모색하는 무한 경쟁의 시대의 산물이다. 드라마와 사건, 이야기 또는 내러티브와 서사는 현대미술의 밖의 세계이거나 또는 현대미술 작품이 아닌 그것을 창조하는 작가의 몫이 되었다. 작가 자신과 함께 작가를 둘러싸고 형성된 미술계 커뮤니티의 일원들이 마치 어떤 배역을 맡은 것처럼 화면에 등장한다. 각자의 시선은 막연하거나 통일되지 않은 채 제멋대로이다. 초현실적 풍경을 배경으로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활동하던 인물들이 작가의 화면 속에 동시에 공존하는 세계를 만들어낸다. 사람들이 사라져버린 세계는 얼마나 무의미한가. 물에 반사되는 실제 현실과 존재가 호수나 강물의 표면에 유동하며 반영하는 세계, 다른 차원의 세계가 교차하는 마술적인 중간계를 그린다면 이러한 풍경일 것이다. 담담하고 치밀하게 조직해나가는 초현실적 풍경과 함께 엮여지는 서사가 펼쳐진다.

이우창_874-625_캔버스에 유채_130×162cm_2009

이우창의 작업은 가장 고독한 단독자로 존재하는 자아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다. 치밀한 재현성과 표현력에도 불구하고 노골적인 조형적 기교나 과장이 등장하지 않는다. 자화상 시리즈와 거주하고 그림을 그렸던 작업실, 작가의 삶과 일상을 구성했던 공간과 사물, 관계들을 차분하고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의 회화는 평범한 사물과 인물이 적절한 수준의 사실성이 공감을 이끌어내는 이미지들이다. 작가는 이른 나이에 자신의 세계를 만들고 사라져버렸다. 화가로서 창작의 열정으로 이어가려했으나 혈액암을 겪으며 꺽여버린 것이다. 더 이상 새로운 작업이 생산되지 않는 멈춰버린 창조기계. 이미 세상을 등진 젊었던 화가의 남겨진 작품들은 한 예술가의 유품이자 동시에 영원성을 지향하나 마침내 도달하지 못하는 현대미술의 어떤 숙명 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화가가 그림을 멈추지 않는 것은 일상에 거주하지만 탈속을 반복하는 과정이다. 그의 이미지는 마음을 움직이는 사물들, 그 사물들의 표면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 "몇 살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오래전, 눈 내리던 날 몸살감기로 병원으로 가는 길. 등에 업혀 그 따듯함에 의지했다. 나이 서른이 넘어 몸을 기대어 보고 문득 잡아 본 손. 마른 살갗에 먹먹해진다. 정에 기대어 살 수 밖에 없는 사람. 나는 그것을 추상하지 않고 사실들로부터 인식한다. 이야기는 과거 혹은 감성으로부터 하나의 형상으로 드러난다. 먹은 만큼 살찐 뱃살과 같은 전개라고 할 수 있다." (이우창 작업노트) ● 미처 자신의 예술세계를 완전히 제시하지 못한 채 요절한 이우창 작가의 이미지는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 속 깊이 파문을 일으킨다. 그의 때 이른 죽음과 함께 그의 예술도 함께 종료되어 버리는 것일까? 회화는 결국 존재와 비존재. 삶과 죽음의 컨텍스트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잡고 세게 또는 약하게 진동하는 것이 아닐까?

이혜인_Sync_0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유채, 잉크젯 프린트, 펠트 등_200×195cm_2018

이혜인 작가의 작업은 현대 회화가 지향하고 있는 전통적인 회화의 창작과 소통의 관습에 대한 반성적 사유와 감각적 표현의 융합을 떠올린다. 작가는 창작조건을 구조하는 시간과 공간, 창작방법과 재료, 그리고 관객과의 소통의 방식 등 전반적인 현대회화의 조건들을 사유하고 표현하며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영상시대의 인식과 경험, 설치 또는 환경의 문제 등이 작가의 창작과정에 포함된다. 작가에게 회화 이미지란 이 모든 과정들을 가로지르며 남겨진 흔적, 일종의 작가의 정신 속에 펼쳐지는 일상과 비일상의 혼합이다. 구체화되는 형상과 뭉뚱그려지며 형상을 상실해가는 운동이 함께 휩쓸려간다. 이리저리 요동치는 빛과 어둠, 방사되는 운동성, 축소되거나 충돌하는 작가의 행위들이 한 화면에 중층적으로 쌓인다. 이런 방식을 통해 관객을 몰입시키는 이미지의 집합을 구성해낸다. 단순히 하나의 화면에 많은 형상이 모여 있다고 해서 미학적으로 성공적인 복잡성을 구현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의 이미지는 풍부하면서도 밀도 있는 조형언어와 작가의 심리상태, 작가가 속한 사회와 문화를 입체적으로 상상하게 만든다. 구체화되지 않는 현실에 처한 개인의 불안과 막연한 백일몽 또는 악몽이 뒤섞인다. 작가가 처한 동시대의 현실과 정서를 담으려는 것이다. 더욱 복잡해진 사회와 개인의 문제를 다층적인 이미지들의 구성으로 표현하는 현대 회화의 변화를 읽을 수 있다.

류노아_Silent Night_캔버스에 유채_90×120cm_2019

류노아 작가는 자신이 마치 기계가 세상을 바라보고 창작하는 것처럼 창작하기를 상상한다. 하나의 기계처럼 변한 자신을 생각하는 상상의 영역으로 화가로서의 정체성을 자신의 정체성을 재구성한다. 이러한 작가의 태도 또는 인식의 방식은 전통적인 세계관과 인간관에 대한 예술적 농담이나 비판적 제스처로 보인다. 우리는 인류의 역사가 사람을 정치와 경제의 수단이나 재료로 다루려는 끊임없는 시도를 목격한다. 그리고 그러한 시도는 점점 더 확대되고 있다. 작가의 작업은 마치 20세기 전후의 벽화작업을 떠올리는 공장, 건설, 폭력, 고통, 집단적 행동 등 정치경제사회를 바라보는 예술의 시선을 예시한다. 세계화라는 미명으로 소득격차가 커지고 사회가 보수화되는 현실의 풍경화처럼 보인다. 형식적으로는 초현실주의 전통을 계승한 듯, 관련 없는 이미지, 사건들이 한 장면으로 꼴라주 된다. 사람들은 기계나 로봇처럼 변해버린 인간의 모습, 거칠고 불편하고 불안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거대한 자연과 사회, 그리고 인간의 욕망이 태풍이나 해일처럼 지나가버린 또는 곧 닥쳐올 것 같은 불길한 그림자가 짙게 깔려있다. 현실의 그늘, 고통과 갈등과 폭력의 그림자에 삼켜버린 삶을 담고 있다. 인간의 현실은 결코 안전하고 평안하지 않은 채 내동댕이쳐진다. 사람들의 포즈와 표정, 그들이 있는 장소와 환경은 결코 유쾌하거나 풍요롭지 않다. 류노아의 세계는 냉소적인 리얼리즘과 현실비평으로 가득 차 있다. 경제와 정치가 작동하는 현실에서 인간은 부속품처럼 도구화된다. 그러나 그런 현실을 그대로 수용하기에는 인간은 사유하고 성찰하며 존재한다. 비평적 존재로서 인간은 표현된다. 류노아의 조형이미지는 19세기에서 20세기를 거쳐 전개되었던 정치경제의 부도덕한 면을 드러낸다. 전쟁은 매일 일상처럼 벌어지고 있다. 우리가 발딛고 서 있는 현실이다. 그런 현실에 매달린 꿈 또한 비루하고 비참할 수밖에 없다. 가볍고 순결하며 따듯한 몽상, 현실을 넘어서는 힘이 부족한 시절을 보내는 사람들의 감정이 이미지화된다. 그의 그림 속에서 인간과 인간의 현실 속 모순과 갈등이 제 모습을 갖추려는 듯 건설되고 있다.

심우현_Last Night Dream_리넨에 유채_103×120cm_2018

심우현 작가의 그림은 익숙한 꽃과 잡초와 나무와 숲과 산등성이 미로처럼 얽혀있다. 그녀의 이미지는 자연의 풍경을 닮아 있다. 몽환적 상태의 주춤거리며 이중삼중으로 겹치는 자연의 식물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드로잉과 채색으로 오밀조밀 채워진 화면은 거대한 숲이자 미로를 닮은 벽화처럼 있다. 숲은 정오의 시간, 몽상에 빠져 시간을 길게 늘려 놓고 있다. 몽상하는 것은 문득 떠오르지만 어김없이 망각하는 장소와 시간으로 몰아세운다. 심우현의 드로잉은 결코 개별적이며 특수한 경험의 혼돈 상태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경험들의 뒤섞임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동시에 진행하는 재현의 운동이다. 모호하면서 규정할 수 없는 이미지들의 겹침과 혼선이 사람의 깊은 내면의 운동을 은유하기 때문이다. 드로잉은 그 자체로 운동하는 은유가 된다. 그녀의 드로잉은 현실의 그림자나 환영처럼 암시적이다. 드로잉은 사건과 물질을 꿈과 초현실로 변화시킨다. 그것은 선명한 정신이 꿈꾸는 것처럼 불가능한 구조와 흐름으로 구성된 환상을 보여준다. 간명하고 명료한 형식으로서 드로잉은 거대한 벽화를 위한 방법으로 활용된다. 내밀한 감각과 정서의 변화를 기록하고 표상하는 것으로서 인간, 자연, 자아 뭐가 되었든지 그녀에게 드로잉은 기념비적 장치가 되어버린다. 화가의 그림을 통해 사람들은 숲과 자연의 생명력이 우리의 거주지 주위에 여전히 살아있음을 느낀다. 화가의 숲은 인류가 나무에서 내려와 완전한 균형과 조화의 자연에서 벗어나 인간의 문명과 문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망각하였던 장소를 떠올린다. 숲은 자기 존재의 출발지였던 고향 또는 원형의 장소의 알레고리이다.

안두진_먼 곳과 가까운 곳 Far_Clos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유채_97×130.3cm_2016

안두진 작가는 오랫동안 붉은 비현실적 또는 초현실적 세계의 풍경을 묘사해 왔다. 작가의 이미지는 주로 미술관의 기원과 관련해 상상해 온 신화와 제의의 장소, 인류의 숙명과 관련한 비극과 숭고가 뒤얽힌 장소, 현대인의 일상을 무겁게 내리누르는 장소들이다. 세상은 마치 붉은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불길한 풍경이다. 지구가 아닌 외계의 풍경, 우리가 사는 차원이 아닌 세계를 재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천둥번개가 치고 돌개바람이 불 것 같은 불길한 조짐이 화면 전체를 감싼다. 최후의 전쟁을 앞두고 나의 운명을 심판할 시간이 곧 당도할 것처럼. 작가의 대표 이미지는 거대한 화면에서 점점 작은 화면으로 이동하면서 동시에 큰 바위가 점점 깎여나가 마침내 아주 작은 돌멩이로 변하는 과정을 표현하고 있는 특유의 비현실적 풍경이다. 세상은 온갖 소동과 혼잡으로 정신없이 돌아가도 바위는 묵묵히 제자리에 뿌리내리고 있다. 변하는 것은 시간과 바라보는 자이다. 바위의 시각에서 보는 세상은 결코 불길하지도 불편하지도 않다. 바위의 현실은 영원성, 항구성 속에 있다. 그것은 영겁의 시간과 찰나의 시간이 동시에 가능한 초현실의 세계이다. 화가가 꿈꾸는 이미지는 어떤 현실의 조건과 구조 속에 결합해 있어도 기본적으로 현실과 동일하지 않다. 현실과 거의 일치할 정도로 닮음 꼴일지라도 꿈은 현실이 아니다. 현실을 넘어선다.

김효숙_파란방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45×145cm_2018

김효숙 작가는 분열하고 해체되는 현실을 체험하고 재현하고 있다. 어린 시절의 빈번하게 반복되던 이사의 경험과 화가로서 성장하는 과정에서 겪는 여러 도시의 레지던시 경험을 통해 바뀌는 거주공간의 구조와 풍경의 탓이리라. 이는 세상의 변화를 바라보는 작가의 고유한 시각을 형성하는 기원이 되는데, 그녀에게 환경변화란 결국 닮은 듯 조금씩 편차를 지닌 삶의 변화이다. 변화를 담은 이미지는 도시와 현실의 구조가 분열하고 재조합(융합)되는 날카롭게 파편화되는 세계의 유기적 운동으로 나타난다. 작가의 하루하루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재현된 이미지를 수집하는 시간으로 채워진다. 사방으로 복잡하게 풀어헤쳐진 세계의 조각을 주워 모은다. 이렇게 수집된 이미지들은 작가 자신의 위상학이 된다. 수집된 이미지들은 절개되고 접착되고 교직하면서 작가 개인의 시공간이자 공통의 경험의 시공간을 구성한다. 대부분 100호 이상의 화면에 빽빽하게 세계의 구조가 뒤틀리고 꼬이고 복잡하게 조직되어 있다. 초기 컴퓨터그래픽을 연상케 하는 대상의 분할과 조합이 어떤 알고리즘을 따라 진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모든 것이 두 손에 쥐어져 있는 레고블록처럼 그러나 결코 아름답거나 부드럽지 않은 삶의 조각들을 맞춰나가야 할 것 같기도 하다. 그물망처럼 세계로 확장되며 자기 복제하는 도시는 누군가에게 불길한 미로처럼 보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보물을 안겨줄 궁전(迷宮)으로 보일 것이다. 궁전의 내부는 마치 세계의 내장(內臟)처럼 드러난다. 칙칙하고 날카로운 내장. 아이디어와 집중력, 그리고 정교한 결합의 기술을 마치 숙제처럼 던져놓는다. 그 과제는 작가가 던진 것인지 아니면 외부의 다른 힘이 작용하여 작가에게 또는 관객에게 던져놓는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 말이다. 반복해서 쪼개지고 증식되는 이미지는 불안을 낳는다. 해체, 단절, 접속, 치환의 운동이 무한히 반복되고 확산하여 마침내 평균적인 인식판단의 범위를 넘어선 세계에 편재하는 것들을 재현하려는 시도이다.

박승예_flying object of the andromeda_종이에 펜_110×80cm_2015

박승예 작가는 지난 시기 펜드로잉으로 제작한 기괴하게 변형된 자화상 또는 인간의 초상인 '몬스터'연작으로 잘 알려져 있다. 작가는 드로잉(그림을 그린다는 행위)을 "노동이라기보다는 좀 삭신이 쑤시는 유희 같다.(박승예 작업노트)"고 말하는데, 그 유희는 매순간 '우리는 행복한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하고 또 끊임없이 그 질문으로 회귀한다. 그 질문은 개인의 질문이자 동시에 매우 보편적인 질문이다. 난해하고 광범위한 주제를 다뤄야하는 이 질문은 인류사 전체를 아우르는 문제로 확산될 수 있다. 마치 산해경속 듣도 보도 못한 존재들처럼 행복은 무한히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작가는 이미지와 관념으로 도피하지 않고 어떤 '존재들'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말을 건다. 몬스터는 얼굴과 손과 다리와 몸통이 결합된 혼돈의 형상이다. 이 형상은 구조와 질서, 상식과 합리의 세계를 방문한 예기치 않은 정체불명의 방문객이다. 그렇다고 몬스터의 이미지가 작가의 내면의 이야기나 개인적인 자화상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작가의 서늘한 몬스터 이미지는 인간의 숨겨진 차원이며 세계의 다양성의 얼굴이며 그림자 세계를 은유한다. 인간을 반영하는 거울이며 이 거울은 인간의 내부에 있기도 하고 외부에 있기도 한다. 혼란스럽고 애매한 관계가 요동치는 현실의 반영인 것이다. 인간과 세상이 괴물을 창조하기도 하지만 사유의 원형(신화)의 세계에서는 괴물이 인간과 세상을 창조하기도 한다. 몬스터는 세상의 숨겨진 차원의 거주자들이다. 그들은 현실이 악몽(惡夢)과 구별할 수 없이 가까워지면 어김없이 등장한다. 작가는 그 한가운데에서 자기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만나_벽 앞 In front of a Wall_캔버스에 유채_112×162cm_2017

이만나 작가의 이미지는 집요하고 촘촘하게 조직된 일상이다. 매순간의 삶이 사라져버리는 일상은 지루함과 가벼운 존재감을 벗어나 무겁고 단단한 이미지로 조직된다. 역동성을 극도로 집약해나가 마침내 담담한 채색과 음영의 미세한 변화로 만들어진 이미지가 출현한다. 작가의 긴 독백을 보자. "어느 순간 예측할 수 없는 어떤 시간과 장소에서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아득해지는 어떤 막연한 감동을 느낀다. 확실히 규정할 수 없는 그런 감각 속에서 그 현기증 나는 모서리 위에 스스로를 지탱하기 위해 나는 일상의 보법을 유지하면서 비일상과의 접경을 아슬히 걷는다....이제 초월적인 것은 완전히 사물 안으로 들어와 있다. 나는 사실을 그리면서 그 사실이 가리고 있는 부분을 드러내기를 바란다. 그러나 들여다볼수록 사물의 이면은, 세계의 배후는 사실로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느낌으로만 거기에 있다. 초월적인 것은 이미 내 안에 있음을 깨닫는다. 이제 그려내야 할 것은 사물 안에 있고, 그것의 표현은 나의 내부로부터 나온다.(이만나 작업노트)" 작가는 일상에서 망각되어 존재감과 의미가 최소화하는 것들을 쌓아 놓으려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런 과정은 자기 존재를 긍정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실존적 가치, 자기 존재의 의미를 자기 내면에서 모색하는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거의 모든 시간을 그림을 그리는 시간에 온전히 부여하기 위해 나머지 활동을 최소화한다. 일상과 사물과 사건과 자신의 감각을 시간의 탑을 쌓듯 치밀하게 공을 들인다. 무수하게 반복되는 작은 색면과 조밀한 터치를 사용해 마치 압박붕대로 일상을 단단히 조여 놓는 방식 가운데,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현실이 생성된다. 일상과 자신의 내면의 운동과 시름하는 사이에 우리는 창조의 과정을 상상한다. 지루할 수 없는 흥미로운 무수한 사건들이 모이고 엉킨다. 시간 또한 두꺼운 표면들로 쌓인다. 일상은 기념물이 되어버린다. 현실의 풍경은 심리적 풍경으로 전환된다. 성처럼, 벽처럼 단단한 형이상학적 풍경이 나타난다.

안경수_전갈 messag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7×72.7cm_2018

안경수 작가의 작업은 물감을 뿌리고 흘리며 덜 마른 채색 위에 붓질을 쓸어내는 흔적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격렬한 작업의 과정은 공사 현장이나 도시 근교나 퇴락한 70, 80년대 건물들과 골목의 풍경이다. 그림이 그려지는 이차원의 표면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고 이리저리 튄 물감들은 사람들의 욕망과 상처의 깊은 혼란을 기록한다. 작가는 사생과 사진, 영상 등 다양한 과정과 매개과정을 통해 작품을 제작한다. 장소성에 대한 다양한 관찰과 기록과 개입을 통해 현장성과 시간성이라는 전통적인 회화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서이다. 제작기간 동안 반복해서 같은 장소를 방문하고 관찰한다. 그의 작업은 최초의 인상과 이후 반복된 방문으로 생기는 시간의 차이와 변화하며 중첩되는 인상들, 그리고 다양한 기록장치를 사용해 한 순간의 형상화된 이미지로 구성된다. 하나의 이미지는 적어도 세 가지 차원 이상의 복수성을 담는다. 그에게 세상은 한번에 기록되고 표현되는 단수성의 세계가 아니다. 인간의 시각경험과 이해의 한계를 훌쩍 넘어서는 복잡성의 세계이다. ● 안경수의 작업은 화면의 복잡성만큼이나 그 표면의 얇은 두께가 대비된다. 하나의 표면에 재료와 행위의 다양한 흔적과 함께 재료의 물질성의 두께가 최대한 축소된, 얇은 표면은 전통적 의미의 '회화'라기 보다는 많음과 적음이 공존하는 기이한 결합의 '이미지'이다. 이미지는 실재를 담보하지 않지만 가장 근접한 영역까지 다가가고 가끔은 그 영역을 침범해 실재와 만나기도 한다. 이는 비현실적이어서 마치 유령의 시각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높은 수준의 회화란 인간의 평균적 시각을 넘어선 다른 존재의 눈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관객은 사심없는 수용자로서 이상적 관객이어야 하고 작가는 높은 수준의 제작자여야 한다. 어디로 향할지 아무도 모르는 상태에서 작가와 대상과 표현재료와 형식, 관객 등 보다 섬세하게 분화되는 현대 회화의 지평, 어떤 경계들이 감지된다. ● 우리는 작품 제작의 시간과 물리적 양 이상으로 그 시간 사이에 벌어진 무한수의 내적 인상과 경험의 기록을 한번에 경험한다. 작가가 반복된 인상들의 축적을 하나의 이미지(그러나 복합적 이미지)로 제시했다면 관객 또한 단수가 아닌 복수의, 수많은 '경우의 수'를 포함한 복잡성을 경험하는 것이다. 작품이 복수의 경험을 단수의 이미지로 만든다면 작가와 관객이 경험하는 내적 인상의 복수성과 복잡성은 모순적이지만 동시에 신비하게도 연결된다. 안경수의 회화는 기록과 표현 사이의 가장 근접한 경계, 섬세한 모서리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채영_섬_한지에 먹_130×162cm_2016

이채영 작가의 풍경에는 수평의 구조가 강조되는 건물이나 벽과 나무와 덤불과 낮은 높이에서 조망하는 저수지나 늪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그녀의 작품들은 마치 식물학자의 식물도감처럼 풀과 나무, 나뭇잎 하나하나를 일일이 채집하듯 기록한다. 감정을 절제한 상태에서 작업한다. 가능한 채색을 단조롭게 하거나 완전히 제거한 모노크롬의 채도와 대상의 정교한 관찰과 기록으로 채워진다. 그리지 않은 여백마저 미세하게 붓질로 가득찬 것처럼 느껴진다. 늪이나 저수지, 황량한 벌판 위나 도시 외각에 띄엄띄엄 자리한 오래된 창고들, 공사장을 가린 임시 방벽과 잡초들이 조감된다. 오래되고 퇴락한 시멘트벽과 습기에 침식되어 썩고 있는 벽, 잡초들, 방치된 장소의 전형성을 담고 있다. 그녀의 작업은 개별적으로 분해되어 고립된 일상을 담고 있다. 일상은 사물화되고 파편화된 풍경으로 나타난다. ● 작가는 대상에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관찰하며 조밀하고 꼼꼼하게 묘사한다. 그러나 사람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작가와 대상의 관계만이 드러난다. 그러나 건물과 장소는 비밀스런 방식으로 사람을 기억하고 관계를 재생한다. 망각되는 것들은 건물이나 장소, 풍경이 아니라 그 안에서 복작거리며 아귀다툼 하는 사람들이다. 연상되는 이미지와 관념의 연쇄를 통해 작가가 속한 사회, 시대와 장소, 과거의 관념과 시각이 침범한다. ● 일상과 현실의 욕망과 관계가 증발된 곳에서 솟는 회화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채영의 이미지는 사람들이 모두 떠난 뒤의 적막감, 종교적 차원의 적멸(寂滅)의 형상일지도 모른다. 오래전 욕망이 모두 사멸해 버린 뒤의 풍경이다. 사람들의 구체적인 욕망으로부터 벗어난 공간이 균일하게 나타난다. 너무나 균일하고 조용하며 규칙적인 상황에서는 아주 미세한 변화나 소음도 마치 천둥처럼 느껴진다. 박제화된 일상의 변화, 내면의 작은 감정의 변화 또한 마찬가지다. 단독자 또는 개별자로서 실존하는 개인의 독립적이자 동시에 원자적 고립의 상태는 일종의 생명과 문화를 영속할 수 없는 불임상태이다. 그러나 불임의 이미지는 역설적으로 수많은 생명 탄생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균일하지만 무언가 떠나버린 텅 빈 이미지는 의미의 부재와 동시에 의미가 탄생하는 순간을 은유한다.

장재민_나무 밤 The night of the tree_캔버스에 유채_162×130cm_2017

장재민 작가는 오랫동안 낚시터의 풍경을 담아왔다. 낚시란 여가활동이자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을 깊이 사유하는 활동이기도 하다. 이후 낚시터의 풍경은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는 거대한 풍경으로 변한다. 빛도 거의 없는 검고 축축한 세계이다. 숲은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점점 더 견고한 공간으로 변한다. 사람의 마음과 욕망의 문제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처럼 차단된다.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밀림처럼 들어가면 사로잡히는 미로의 이미지이다. 밀림의 삶은 취미의 세계가 아니다. 생존의 경험과 그 파편들, 기억의 꼴라주로 조직된 세계이다. 이 세계에서 필요한 것은 절박한 생존술이다. ● 작가의 작업은 나무와 덤불 사이로 보이는 도시나 마을의 어두운 풍경이 주조를 이룬다. 거대한 나무들, 그것은 풍경이 해체되고 새로이 조직되는 상태의 이미지이다. 찰나의 시간에 세상이 미묘하지만 완전히 다른 세계로 변한 것 같다. 그 이미지는 두꺼운 물감과 어둡고 눅눅한 칼라와 묵직한 붓질로 습하다. 밝음, 경쾌함과는 거리가 멀다. 마치 태풍이 지나가는 풍경 같다. 각종 오물로 더럽혀진 풍경이다. 그의 이미지는 단순히 시각적 감정과 인식을 위한 풍경은 아니다. 오히려 시각보다는 후각의 이미지이다. 그의 풍경은 물비린내가 뒤섞인 눅눅하고 기묘한 냄새를 담고 있다. 유기체처럼 대상과 뒤섞이고 융합한다. 화면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들의 집단, 군락(群落)을 이룬다. 검은 구멍의 형태와 후각의 신경망이 뒤얽힌 이미지다. 시선은 축축한 점액질로 이루어진 신체처럼 빽빽한 숲을 이동한다. 마치 대상을 포착하고 관찰하는 양서류나 파충류의 감각을 닮았다. 이들은 피부로, 온 몸으로 세계와 접촉한다. 눈이 코가 되고 손가락이 냄새를 맡으며 피부는 귀가 되어 어떤 속삭임을 듣기도 한다. 일상과 일상의 사이, 정체불명의 관계와 덩어리가 뒤엉킨 채 알 수 없는 것들의 세계의 이미지이다. 그 사이사이 다양한 장소와 풍경과 만남과 관계들이 펼쳐지고 형성된다.

김수연_PP11_캔버스에 유채_60×60cm_2019

김수연 작가의 작업은 실재를 모방한 또는 차용한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꼴라주해 사물의 이미지들로 재구성되어 연출된다. 거대한 기구가 공기 빠진 풍선처럼 비틀린 채 납작해지고 대리석 조각들이 구겨진 사진조각들로 변한다. 종이에 인쇄된 촛불이 패티시즘을 연상시키는 손과 신체들과 함께 풍경을 만든다. 이미지들은 오늘날 우리의 내면 깊이 자리한 속물성을 담은 대상으로 해체된 사람들과 사물들이 사라지고 남은 유령(이미지)들의 풍경이 펼쳐진다. 시간이 정지한 한 순간을 얇은 이미지의 면들, 조각들이 이리저리 결합되어 있다. 출판물에서 차용한 다양한 사진이미지들이 변형되고 본래 이미지들이 풍기던 아우라가 사라진 채 부정확하고 느슨하게 연결되어 중첩된 부조(浮彫)로 바뀐다. ● 이러한 연출은 일상의 삶의 밀도와 중력을 벗어난 마음 속 풍경을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풍경이고 공간이다. 마치 편집디자이너의 작업을 닮은 과정을 통해 연출된 공간은 풀과 가위로 만든 드로잉이자 건축이기도 하다. 이런 방식으로 작가는 독특한 자기만의 환경을 만든다. 모든 사물이 지닌 본래의 속성과 무게를 상실하고 중력과 상관없이 가벼운 것들로 중화된다. 페이크이며 허구의 이미지를 사는 우리의 풍경이기도 하다. 허상들로 꼴라주된 이미지들은 원본이 사라진 모방과 차용의 세계이다.

박광수_검은 숲속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2×130.3cm_2018

박광수 작가의 작업이 재현하는 세계는 무채색의 세계이며 가을과 초겨울 사이에 명멸하는 시간을 포착하려는 듯하다. 세계는 결코 풍요롭거나 신뢰할 만한 곳이 아니다.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는 사람들 간의 끈끈한 우정과 신뢰는 사라졌다. 세상은 척박하고 메마르며 쓸쓸한 곳이다. 어떤 선명하고 명징한 일들이 있기나 했던가? 이리저리 뒤섞인 선들의 방향과 굵기와 밝고 어둠의 대비가 숲과 사람이 하나로 융합하는 풍경을 만든다. 화면을 가득채운 나무와 가지들이 원근을 이루며 화면 중앙의 희미하게 밝은 부분을 향한다. 그러나 선들의 방향은 일정하지 않다. 선이 뒤엉키고 꺾기며 방향을 틀어버린다. 중앙의 빛은 희망이나 꿈 또는 그저 어두운 숲을 빠져나가는데 필요한 목표나 출구일 수도 있다. 작가의 몸과 운동, 정신과 신체가 어울려 형식적 표현의 테크닉이 하나의 완성된 세계를 이룬 듯 보인다. ● 그의 '검은 숲'과 '부스러진' 시리즈는 작가의 마음에 엄습하는 불길한 전조, 불분명한 사건의 그림자를 형상화하고 있다. 작가가 제시하는 것은 정지된 구체적인 존재로서의 대상이 아니라 대상이 오기 전 예측되는 어떤 조짐 또는 이미 지나가버린 뒤 남겨진 흔적 등을 재현하려는 것이다. 사물이 아니라 사건을 둘러싼 것들이다. 현대미술에서 회화의 대상은 회화 자신, 작가 자신, 대상 자체로 확장된다. 회화의 결과는 하나의 순간이다. 회화가 생성되고 구성되는 순간들, 과정이 중요하다. 시각과 효과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 어떤 심리적 또는 형이상학적 기능이 더 중요해진다. 작가의 풍경이 평이한 풍경이 아니라 마음속에 떠오른 이미지들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작가의 회화는 사건과 사물, 현실의 사건과 형이상학적 사유가 만나는 경계에 있게 된다.

위영일_Embed-landscape 5_패널에 스프레이, 펜, 유채, 아크릴채색, 실크스크린, 폴리 퍼티_120×180cm_2019

위영일 작가의 작업은 회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작가와 관객의 관계를 역전시키는 과정을 전통적인 회화의 양식에 독특하게 결합시킨다. 작가가 명명한 자신의 「알레아토릭 페인팅프로젝트(Aleatorik Painting Project)」는 미술사를 바탕으로 미리 제작된 매뉴얼에 주사위를 던져서 나온 6개의 경우의 수열을 해석하여 다양한 회화작업으로 옮기는 행위를 통해 전통적인 작가의 고유성을 해체하고 항상 유동적인 상태로 만드는 것을 의도한다. 작가의 「리얼 레이어 시리즈(Real-layer)」는 환영을 유도하는 평면상의 가짜 레이어를 매체까지 확장해 실제 공간속으로 끌어내고 환경과 관계하도록 한다. 「월페인팅시리즈」는 회화의 노마딕(nomadic)속성을 해체하여 시간과 공간 속에 일회적인 상태로 존재하게 만들며, 「임베드 랜드스케이프시리즈(Embed-landscape)」는 회화의 제작과 감상방식에 관한 고정관념을 흔드는 것을 의도했다. ● 작가는 이런 방식을 고안하고 실제 전시를 감상하는 관객들에게 실연시킴으로써 조형적으로는 전통적인 회화의 재현 방식을 따르지만, 회화를 닮았으나 결코 회화가 아닌 개념의 운동 또는 개념의 유희를 제시하고 있다. 작가는 이를 통해 전통적인 미술의 가치, 미술관 제도, 창작과 감상의 관습을 비판한다. 관객은 작가와 동일한 선상에서 함께 주사위를 굴리고 작품의 키워드 또는 소재나 이미지를 선택한다. 기이한 주문자 생산방식으로 생산되는 이미지를 통해 작가는 마치 공장의 노동자 또는 이미지를 만드는 기계처럼 설정된다. 전통적인 화가의 정체성과 자아를 붕괴시킨다. 결코 특별하지도 않고 신비하지도 않은 특권의 지위에서 하강해 평균적 감성과 감각의 소유자로 일상을 견디는 것이다. 작가는 결코 작가가 아니라 관객과 대화를 나누는 대화파트너이자 일종의 가이드처럼 행동한다. 그의 빠르고 정확한 회화의 테크닉은 철저하게 개인의 고유성이 아니라 일정한 경지에 오른 생산기계의 기능처럼 이해된다. 앤디 워홀이 한 때 꿈꾸었던 기계가 되고 싶다던 그 경지 말이다. 관객들은 작가가 제시한 여러 가지 선택지들을 받아들고 회화를 공동 창작한다. 관객들은 각자의 성장과정과 학습을 통해 형성된 취향과 판단력을 활용해 작가로 하여금 이러저런 방식으로 작품을 제작하도록 요구할 수 있다. 관객은 실상 또 하나의 창작을 위한 선택지 또는 냉정하게 말하면 중요한 도구로서 기능한다. 그러나 결코 공동창작이 될 수는 없다. 공동창작이란 하나의 꿈이다. 최종 승인자가 누구이냐의 문제는 항상 존재한다. 여전히 개인으로서 작가는 작품의 최종 승인자로 남는다. 전통적인 작가상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그것은 하나의 연극적 장치, 위영일 작가만의 타자와 관계맺기의 방식이다. 작가의 존재방식을 살짝 틀어놓는 것이다. 우리는 그 약간의 뒤틀림에서 작가의 작업이 지닌 특이성을 발견할 수 있다.

3. 회화의 시간, 그 후 ● 주위에는 수많은 화가들이 미술사에 등재되기 위해 또는 자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쉬지 않고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거의 대부분의 화가들이 아무도 모르게 사라져 버린다. 미술의 역사란 작품의 역사만큼이나 작가들의 역사이다. 거기에는 평범과 비범 사이에서,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재능과 창조력을 불태우는 화가들이 등장한다. 영원히 늙지 않은 채 미술사에 신화와 전설로 회자되는 요절한 화가들과 왕성한 창조력의 시기를 지나 인생의 황혼기에 들어선 노화가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화가의 꿈과 삶에 대해 우리 자신을 대입시켜보고 공감한다. ● 우리는 화가들의 삶과 그들의 작품을 통해 우리 자신의 유년시절을 떠올린다. 현재의 우리의 일상과 현실을 떠올리고 마지막에는 죽음과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일종의 불멸의 삶을 회화를 통해 상상한다. 시간은 하나의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 완벽한 예술이 불가능하듯 하나의 완전한 소통과 공감의 기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회화를 바라보고 화가들을 생각하는 시간을 통해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시간, 마음 속 심연과 마주할 수 있는 자유를 잠시 얻을 수 있을 뿐이다. ■ 김노암

Vol.20190503a | 회화의 시간-종근당 예술지상 역대 선정작가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