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안녕

이영숙展 / LEEYOUNGSUK / 李英淑 / painting   2019_0515 ▶︎ 2019_0623

이영숙_숨-안녕_한지에 채색_116.8×91cm_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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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라이프로리 아카이브 갤러리 / 2019_0515_수요일_05:00pm 이천아트홀 갤러리 / 2019_0615_토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2019_0515 ▶︎ 2019_0521

라이프러리 아카이브 갤러리 Lifrary Archive Gallery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0 3층 Tel. +82.(0)2.363.5855

2019_0615 ▶︎ 2019_0623

이천아트홀 갤러리 Icheon Arthall Gallery 경기도 이천 부악로 40(중리동 490번지) Tel. +82.(0)31.644.2100 art.icheon.go.kr

반짝이는 '점'이 내쉬는 '숨' - 점의 반복으로 드러난 인간 내면과 세계"사막이 모래의 바다라고 한다면 이 '죽어있는' 무수한 점들이 걷잡을 수 없는, 폭풍처럼 떠돌아다닐 수 있는 능력으로 무시무시한 인상을 자아내게 하는 데도 이유가 있는 것이다. 역시 자연계에서도 점은 가능성으로 충만한, 그 자체로 희귀한 본질이다."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점·선·면』 중에서)

이영숙_숨-안녕_한지에 채색_116.8×91cm_2018

점은 자연이다. 조지 가모프(George Gamow)는 어떤 한 점에서 우주가 탄생하여 지금까지 팽창한 것이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라고 말했다(빅뱅이론; Big Bang theory). 성경에서 작은 겨자씨가 하늘나라와 같다고 하였으니("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마태오 복음서 13,31), 작은 점이 우주의 본체(本體)라고 하는 것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우리는 매일 작은 씨앗이 새들의 안식처가 될 정도로 커지는 신비를 마주친다. 사람은 어떤가? 작은 점에 지나지 않았던 생명이 어머니 뱃속에서 지내다가 10개월을 지나 이 세상에 나오고, 첫 숨을 내쉬며 세상에 나온 것을 자축하듯 큰 소리로 울어댄 후, 점점 자라 어린이로, 청소년으로, 덩치 있는 성인으로 커간다. 이것이 작은 점에 지나지 않았던 우리의 변화다. ● 하지만 점이 시작만 의미하지는 않는다. 소멸의 형상, 바로 죽음의 형상도 함께 가지고 있다. 모든 생명은 결국 죽고, 썩고, 마침내 낱낱이 분해되어 흙먼지가 된다. 우리가 첫 숨을 내쉬었듯, 마지막 숨을 내쉴 날도 예정돼 있다. 그렇게 마지막 숨을 내쉰 후, 우리는 먼지가 된다. 먼지가 되어 하늘을 날아다니고, 강물에 내려 앉아 물결을 따라 유유히 흘러가고, 바다에 도착해 조용히 심해에 침전된다. 우리의 육체가 이렇게 점으로 변할 때, 우리의 영혼은 하늘 나라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점에서 출발해 점으로 도착한다. ● 세상이 응축 되어있는 '점'. 이영숙의 미학은 점의 미학이다. 그리고 세상을 담은 미학이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점은 우주의 중심이며, 전체성이고, 완전함이다. 절대적 실재이고, 만물의 기원이다. […] 이점은 모든 가능성을 합한 점이고, 성스러운 공간이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곳이다." (이영숙 작업노트)

이영숙_숨-안녕_한지에 채색_45.5×116.8cm_2018
이영숙_숨-안녕_한지에 채색_105×75cm_2018
이영숙_숨-안녕_한지에 채색_72.7×60.6cm_2018

'점'이 불어넣은 생명 ● 칸딘스키는 사막을 '죽어있는' 무수한 점(모래)의 바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막의 모래는 '죽어있는' 점이라기보다는 '가능성'의 점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아마도 칸딘스키는 씨앗이나 태아 같은 점들을 '살아있는' 점으로 본 것 같다. 그래서 흙 알갱이로서 점(모래)은 '죽어있는' 점으로 봤으리라. 하지만 이 흙 알갱이들(점들)이 모여 토양을 만들고, 그곳에서 식물이 자라난다. 무수한 흙 알갱이(점)가 식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다. 그렇게 자라난 식물은 초식동물의 먹이가 되고 생태계는 유지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흙 알갱이(점)를 '죽어있다'고 쉽게 단언해서는 안 될 것이다. ● 이러한 사유방식은 이영숙의 작업을 해석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 작가의 초창기 작업에서 점은 '죽어있는' 모습처럼 나타난다. 그저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된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의 새로운 시도와 도전은 조금씩 점에게 생명을 불어넣었고, 마침내 살아 숨 쉬는 생명으로서의 점으로 모습이 변한다. '죽어있는' 점이 어느 순간 '살아있는' 점으로 부활한 듯 보인다. ● 작가는 어릴 때부터 남종화의 대가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외삼촌의 삶과 작업에 영향을 받아 그림을 그리다가 2009년부터 전시를 시작하며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초창기 작가의 작업들은 산을 그린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나 풍경 소묘가 대부분인데, 이 작업들은 기본기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 시기에 주요 소재가 된 산은 어머니와의 기억이 스며있는 장소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며, 어머니를 느낄 수 있는 포근함으로 작가의 내면에 존재하는 곳이었다. 어쩌면 이 시기 기본기에 충실했던 것도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잘 표현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특성을 아주 잘 보여준 전시가 바로 2013년 한국화 개인전 『산-꿈꾸다』(경인미술관)와 『제2회 FACO Art Festival』(대한민국예술인센터 전시장)의 연필 소묘 개인부스전이다. 작가는 이 전시들을 통해 숙련된 산수화와 연필 풍경 소묘를 선보였다. ● 하지만 이 전시 이후 이영숙의 화풍은 점차 변한다. 붓 선으로 그리거나 면으로 농담을 표현하는 것을 줄이고, 이전보다 더 많은 점을 겹쳐 찍어 산수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잘 보여주는 전시가 2015년 개인전 『MOUNTAIN – Poesie』(경인미술관)이다. 이즈음 작가는 본격적으로 '점'과 '반복'에 몰두한 것으로 보인다. 작가는 이후 새로운 시도와 과감한 도전으로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작업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해왔던 진경산수화에서 탈피해서 여러 가지 실험적인 표현 방식을 탐색하면서 이영숙의 작업은 점점 구체적인 형상이 소멸되는 양상을 보인다. ● 그리고 최근에는 구체적 형상이 사라진 자리를 씨앗 같기도 하고, 촛불 같기도 점이 반복적으로 표현된 추상적 이미지가 채우고 있다. 이번 『숨-안녕』 전시에서 선보이는 「숨-안녕」 연작이 바로 이영숙이 이전에 보여줬던 진경산수화와 전혀 다른, '생명이 된 점의 반복'을 보여주는 추상작업이다. 작가는 단순히 표현의 수단에 머물렀던 동양화 점법(点法)을 마치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생명력으로 꿈틀대는 점으로 그 의미를 변화시켰다.

이영숙_숨-안녕_한지에 채색_72.7×60.6cm_2018
이영숙_숨-안녕_한지에 채색_90.9×60.6cm_2017

점법에서 점묘법으로 ● 이영숙 작업의 이러한 변화에서 주목할 부분은 '동양의 점법'에서 '서양의 점묘법'으로 변한 표현 형식이다. 이런 변화는 점의 속성을 바꿔놓았다. 중국 청나라 초기에 편찬된 화보(畵譜)인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에는 점법만 36종이 설명되어 있을 정도로 동양화의 점법은 다양하다. 산수화를 그릴 때 나뭇잎, 풀 등의 입체감, 양감, 질감 등을 표현하기 위한 점법을 점엽법(点葉法)이라고 하는데, 표현 대상에 따라 그 점엽법 또한 다양하게 존재한다. 작가는 기본기에 충실했던 2013년까지의 초창기 진경산수화에서 이러한 다양한 점법을 사용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렇게 다양하게 구사하던 점법이 2013년 이후에는 유사한 형태를 지닌 점묘법으로 변했음을 알 수 있다. 다양한 방식으로 점찍는 방식에서 일정하게 반복해서 찍는 방식으로 변한 것이다. ● 그렇다면 이것은 표현 방식의 퇴보인가? 그렇지 않다. 이러한 변화는 점을 표현의 수단에서 '점 자체'를 드러내는 방식으로의 진화라고 할 수 있다. 점찍는 방식의 변화를 보인 시기의 전시글에 작가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서구 현대회화의 정신성은 전통회화의 전복이라는 Avantgarde로 대변되어진다. […] 정신의 기저는 동양성(東洋性)에 두고 실재하는 '텍스트'의 다양한 변화들을 기존의 동양적 정체성의 모색(摸索)을 통하여 조망(眺望)한다. 그러나 일련의 이런 과정은 결코 전통의 답습과 현실에 안주하려는 것이 아니며, 궁극(窮極)에는 그것을 넘어서고 벗어난 표현(서구적 색상의 표현과 명암법 등)을 통하여 내 안의 변화를 모색하고 반추(反芻)하고자 하는 자신과의 치열한 '모멘트'인 것이다."(2015년 개인전 『MOUNTAIN – Poesie』 전시 서문) 이 글에서 알 수 있듯이, 그 당시 작가는 동양의 정신성을 기존의 전통 방식이 아닌, 그것을 넘어서고 벗어난 서구적 방식으로 표현하려고 시도했다. 여기서 작가가 말하는 서구적 방식은 바로 신인상주의 화가인 쇠라(Georges Seurat)가 이론화하고, 시냑(Paul Signac)이 보급한 점묘법(點描法, pointillism)이다. 그렇다면 동양의 점법과 서양의 점묘법은 어떤 차이가 있기에 그 변화가 중요한가? 동양의 점법이 표현 대상의 묘사를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점을 찍는 방식이라면, 서양의 점묘법은 대기에 떠도는 미세한 빛입자를 찍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점묘법은 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분해되는 색상을 고려하여 색점들을 병치하는 묘법이다. 그래서 점묘법은 대상의 형태를 그리기 위해서 점을 찍는 것이 아니라, 빛에 의해 드러난 대상의 색상을 표현하기 위해 점을 찍는다. 점묘법 그림이 마치 망울망울 떠다니는 색색의 빛입자들로 화면이 채워진 것처럼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동양의 점법에서 서양의 점묘법으로 변한 이영숙의 작업은 대상을 표현하기 위해 점을 찍는 기존의 방식에서, 빛의 색입자를 표현하기 위해 점을 찍는 새로운 방식으로 변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여러 동양화 점법 중 그 대상을 표현하는 데 적합한 점법을 찾아 찍을 필요가 없어졌으며, 빛으로 충만한 대기에 균일하게 존재하는 색상의 빛입자(빛점)들을 표현하면 되기 때문에 유사한 모양의 점들로 화면이 채워지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빛입자로서 점의 표현 방식은 점을 대상에 종속시키는 방식을 벗어나 '점 그 자체'에게 자율성을 부여한다. 점의 속성이 바뀐 것이다. 점은 대상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빛이 있는 대기 중에 떠 있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영숙_숨-안녕_한지에 채색_60.6×90.9cm_2017
이영숙_숨-안녕_한지에 채색_45.5×116.8cm_2018
이영숙_숨-안녕_한지에 채색_130.3×195cm_2016

반복과 차이 ● 이러한 변화는 최근의 「숨-안녕」 연작의 추상 작업으로 이어진다. 기본기에 충실했던 시기의 점찍기는 대상을 표현하기 위한 행위가 중심이었다. 하지만 서양의 점묘법으로 변한 이후 '반복을 위한 반복'에 가까워졌다. 작가는 반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충실한 행위의 반복된 표현은 어디에 이르게 할까? […] 반복은 객관과 주관을 초월한 내외일여(內外一如)를 일궈낸다."(작업노트) 작가의 말처럼, 반복은 반복 이상의 어떤 것을 불러온다. 작가는 어느 순간 이 반복에서 일평생 잠시도 쉬지 않는/쉴 수 없는 '호흡'을 떠올린다. 그렇다면 이 숨은 누가 불어넣어 준 것인가?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기 2,7) 흙의 먼지, 흙의 점들은 사람이 되고, 하느님이 생명의 숨을 불어넣음으로써 생명이 시작된다. 결국 흙의 먼지, 즉 흙의 점은 사람이 되어 숨 쉰다. 칸딘스키가 말한 '죽어있는' 점이 '살아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생명은 일평생 쉬지 않고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살아야 한다. 평생을 반복하는 호흡 속에서 작가는 '반복이 결국 삶'이라는 깨달음까지 얻게 된다. 또한, 자신의 내면에 들어왔던 들숨이 자신의 몸에 잠시 머물다 날숨으로 세상에 나가, 자연의 숨이 되고, 이웃의 숨이 되고, 타인의 숨이 되는 것을 떠올린다. 더불어 자신이 내뱉은 과거의 날숨이, 언젠간 자신이 들이마실 미래의 들숨으로 다시 되돌아올, 그 숨의 순환성을 떠올린다. (숨은 하느님이 내게 태어날 때 불어넣어줄 것이다. / 나와 내면의 숨 / 자연과의 숨 / 이웃과의 숨 / 과거와의 숨 / 타인과의 숨 / 미래와의 숨으로 이어진다. (이영숙 작업노트)) 점은 그렇게 숨과 삶과 반복으로 깊은 사유의 세계로 작가를 끌어들였다. ● 이렇게 확장된 점의 상징성은 마침내 씨앗 모양으로도 보이는, 어쩌면 불씨를 의미할 수도 있는 촛불이 되어 우리 앞에 도착한다. 이것은 이영숙이 빛나는 무수한 점들을 상상하면서 그려낸 점의 형상이다. 개연성 있는 추측을 해본다. '점묘법의 빛입자가 빛나는 점들을 떠오르게 했으리라.' 일견 타당해 보이지만, 작가가 빛나는 점을 상상하는 것은 이와는 다른 차원이다. 작가가 상상하는 빛나는 무수한 점들은 단순히 빛의 입자가 아니라,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의 모습과 빛나는 점을 연결시키며,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나면 하늘의 빛나는 별이 된다는 낭만적인 별(점)에 관한 서사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작가의 뇌리에 남아 있는 빛나는 무수한 점들은 2016년 광화문 광장을 가득 채웠던 촛불들이다. 그 광장에 모였던 한 명 한 명의 마음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이제 점은 단순한 점이 아니고, 점의 반복도 단순한 반복이 아니게 된다. 점이 전혀 다른 차원의 개념으로 도약하는 것이다. 이제 작가의 '반복을 위한 반복'은 그저 단순한 기계적인 반복의 차원이 아닌, 그 차원을 넘어선 곳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차이와 반복』에서 반복의 두 형식을 구분한다. "첫 번째 반복은 같음의 반복이고 […] 두 번째 반복은 자신 안에 차이를 포괄하며 […] 첫 번째 반복은 […] 부정적 반복이며, 두 번째 반복은 […] 긍정적 반복이다. […] 첫 번째 반복은 평범하고, 두 번째 반복은 특이하고 독특하다."(김상환 역, 민음사, 2014, p.74.) 작가의 2015년 즈음 작업들은 들뢰즈가 말한 첫 번째 반복을 시도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던 것이 최근에는 두 번째 반복을 보여주고 있다. 첫 번째는 '같음의 반복'이었다. 하지만 두 번째는 '차이의 반복'이다. 광화문에 모인 촛불을 떠올려보자. 멀리서 보면 똑같은 촛불들(같음의 반복)처럼 인식된다. 하지만 이 촛불들은 한 명 한 명 살아있는 개인들이 모여 만들어낸 의미 있는 빛이다(차이의 반복). 그래서 두 번째 반복에는 첫 번째 반복과는 다른, 각각의 생명에 대한 상징이 들어있다. 이 반복은 동일성이 만들어낸 메마른 반복이 아니라, 차이가 이룩한 풍성한 반복의 빛이다. 그렇기에 이영숙의 최근 연작 「숨-안녕」은 미시적으로 하나하나의 다른 촛불, 다른 사람이 모여 이룬 추상적 이미지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촛불들(점들)에게 "안녕"한지 물을 수도 있고, 이 촛불이 "안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이영숙의 점은 숨을 쉬며 반짝이는 촛불이 되어 우리에게 도착했다. ● 우리의 추상적인 사고 속에서 '점'은 가장 작고 가장 동그란, 가장 이상적인 작은 원이다. 하지만 칸딘스키의 말처럼 "기하학에서 점은 눈에 보이지 않는 본질이다." 지금 이영숙의 점은 눈에 보이지 않는 본질을 상징한다. 작가가 그린 무수히 많은 점은, 그 촛불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다. 그 점들은 반짝인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쉰다. 작가에게 점을 찍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그리는 것이며 세상을 그리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이영숙이 그린 점들은 유난히 보석처럼 빛난다. ■ 안진국

Vol.20190513f | 이영숙展 / LEEYOUNGSUK / 李英淑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