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코룸, 밀고 당기는 꽃의 리듬

이경순展 / LEEKYUNGSOON / 李慶順 / painting   2019_0530 ▶︎ 2019_0612 / 일,월요일 휴관

이경순_보라 라일락_리넨에 유채_31.8×40.9cm_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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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9_0531_금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토요일_11:00pm~05:00pm / 일,월요일 휴관

갤러리 오 Gallery O 서울 강남구 압구정로 108 덕산빌딩 1층 Tel. +82.(0)2.549.2891 www.gallery-o.co.kr

데코룸, 밀고 당기는 꽃의 리듬 ● 지금 내 앞에 보랏빛 라일락을 그린 한 폭의 정물화가 있다. 이경순의 「보라 라일락」(2004)이다. 작은 항아리 안에는 라일락꽃들이 한가득 채워져 있다. 라일락꽃은 개나리꽃이나 안개꽃처럼 가지에 빽빽하게 달려 흐드러지게 피는 이른바 레이(rays) 유형의 형태를 갖는다. 따라서 항아리에 가득 담긴 라일락꽃을 그린 정물화는 꽃이 만개한 풍성한 느낌, 또는 꽉 채워진 분위기를 창출한다. 여기에 더해 라일락 특유의 강렬한 향기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항아리 안에 가득 채워진 라일락꽃들이 자아낼 강렬한 꽃향기를 상상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라 라일락」은 자극의 강도가 매우 높은 정물화라 할 수 있다. 즉 그것은 우리의 시각과 후각에 강렬하고 풍성한 자극과 쾌감을 선사하는 회화이다. ● 그런데 주지하다시피 자극의 강도와 밀도를 늘 "적절하게" 조절할 필요가 있다. 풍성함이 지나치면, 또는 향기가 너무 짙으면 그것은 우리에게 쾌가 아니라 불쾌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집중된 것을 분산시키는 일, 곧 빽빽하게 채우는 일 못지않게 빽빽함을 풀어주는 일도 중요하다. 라일락 향기는 싱그러운 봄바람이 불 때 가장 감미롭지 않은가! 「보라 라일락」의 배경에 보이는 활달하고 자유분방한 붓질 그리고 항아리의 중심에 수렴하는 꽃가지들의 일사분란한 방향성을 흐트러뜨리는 항아리 표면의 수평-지향적 패턴은 자극의 강도와 밀도를 적절하게 조절하는 회화적 장치들에 해당한다. 「여러 가지 들꽃」(2004)이나 「하얀 라일락」(2005)에서 우리의 시선은 처음에는 화면 중앙을 빽빽하게 채운 꽃다발을 향하지만 이윽고 주변으로 이동해 배경을 채운 보다 느슨하고 자유분방한 패턴들을 만끽한다. 이로써 「보라 라일락」을 위시한 이경순의 회화작품들은 과거에 한스 호프만(Hans Hofmann)이 말했던 회화적 긴장, 곧 운동과 역운동(counter-movement), 미는(push) 힘과 당기는(pull) 힘의 상호작용이 촉발한 특별한 긴장1)을 간직하게 됐다. 「보라 라일락」이나 「항아리에 담긴 장미」(1993)에서 항아리에 담긴 꽃들과 바닥에 떨어진 꽃들의 미묘한 상호작용 역시 적절하게 강도와 밀도를 조절하는 효과를 산출한다.

이경순_라일락_캔버스에 유채_50×60.5cm_1995
이경순_보라 라일락_리넨에 유채_53×65.1cm_2004
이경순_하얀 라일락_리넨에 유채_31.8×40.9cm_1994

「창가의 버들강아지」(2004)는 밀고 당기는 힘들이 매우 효과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작품이다. 항아리에 담긴 버들강아지의 호젓한 자태를 완상하던 나의 시선은 열린 창문을 따라 밖으로 향한다. 그러나 나의 시선은 거기서 머물지 않는다. 그 안쪽의 개방된 문을 따라 시선은 다시 여기에서 저기로, 외부에서 다시 내부로 이동한다. 그렇게 다시금 공간의 안쪽으로 이동한 시선은 이번에는 저편에 열린 창문을 통해 다시 밖으로 이동한다. 그렇게 '열림'이 인도하는 경로를 따라 이동하던 나의 시선은 마침내 화면 가장 깊숙한 안쪽에 도달한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시선의 역(counter)-운동이 발생한다. 화면의 가장 바깥 표면에서 가장 안쪽의 깊숙한 곳으로 이끌려 들어간 나의 시선은 담 너머, 문 너머, 창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경로를 따라 가장 깊숙한 안쪽에서 다시 바깥쪽 표면, 처음 출발했던 곳으로 회귀한다. 그 자리에서 나는 저 깊숙한 안쪽에서 불어온 바람이야말로 버들강아지의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동인(動因)이었음을 문득 깨닫게 된다. ● 다시 호프만을 인용하면 밀고 당기는 힘들의 상호작용은 '공간 안쪽으로의 운동(movement into space)'과 '공간 바깥쪽으로의 운동(movement out of space)'의 동역학2)을 촉발한다. 「창가의 버들강아지」에서 안쪽으로의 운동과 바깥쪽의 운동은 일찍이 나혜석이 '평면과 입체가 합해진 공간"으로 지칭한 특별한 회화공간을 매우 독특하게 구체화한다. 「창가의 버들강아지」는 나혜석의 표현을 빌자면 "평면 즉 외면과, 입체 즉 내부가 합하여 하나의 사회가 성립된 것"3)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평면과 입체, 외면과 내부가 합하여 만들어진 공간에서는 어느 것을 따로 떼어 볼 수가 없다.

이경순_탁상의 꽃들_리넨에 유채_53×72.7cm_1990
이경순_여러가지 들꽃_리넨에 유채_45.5×53cm_2006
이경순_창가의 도라지꽃_리넨에 아크릴채색_72.7×90.9cm_2014

그런데 어쩌면 내부와 외부가 합해진 「창가의 버들강아지」의 독특한 구성은 왜 이경순이 그토록 오랜 기간 꽃의 이미지에 몰두해왔는가를 이해하기 위해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항아리에 담긴 장미」나 「뜰의 장미」(2015)에서 활짝 빛 장미꽃 사이에는 망울만 맺히고 아직 피지 않은 꽃봉오리들이 보인다. 꽃봉오리들은 그 안에 많은 것들을 간직한다. 바깥쪽에서 불어온 바람의 자극에 따라 머지않아 그 꽃봉오리들은 입을 벌리고 내부에 간직한 것들을 모두 다 개방할 것이다. 그렇게 '내부'는 마침내 '외부'가 된다. 꽃이 피는 순간은 말 그대로 내부와 외부, 평면과 입체가 합해지는 '의미심장한 순간'이 아닌가!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자면 이경순의 회화는 늘 잉태와 출산이라는 생명의 이치를 담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항아리에 담긴 둥근 꽃봉오리는 곧, 이윽고 피어나 그 생명의 진실과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마찬가지로 내부에서 외부로 다시 내부로, 그리고 다시 외부로 시선의 이동을 촉발하면서 일종의 '감쌈(enveloping)'의 공간을 이루는 「창가의 버들강아지」는 꽃잎들의 겹침(overlapping)을 상기시키면서 동시에 생명의 끊임없는 순환을 연상시킨다. 그 앞에서 나는 돌봄의 온기를 느낀다. 또는 생명의 아름다움을 만끽한다. ● 방금 전에 나는 '생명의 아름다움'을 말했는데 이경순의 회화에서 꽃이 지닌 아름다움이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이 일러주듯- 늘 위태롭고 연약한 상태에 있다. 「하얀 라일락」(1994)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꽃들은 마치 '뜬 구름'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기실 삶이란 이렇듯 늘 위태롭고 연약한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닐까? 아름다움이란 그러니까 절대적인 어떤 것이며 쟁취해야 할 것이 아니라 생(生)의 유동성 속에서 다만 순간순간 얻어야 할 어떤 평형(equilibrium)이 아닐까? 그 평형에서 아름다움을 이루는 것들은 견고한 상태에 있지 않고 다만 적절한 상태, 또는 적합한 상태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고대인들은 따라서 절대적인 형식미와 구별되는 적합성의 미, 곧 '데코룸(decorum)'4)을 말해야 했던 것이다. 밀고 당기는 힘이 상호작용하는 이경순의 회화 앞에서 나는 숨을 고르며, 즉 들숨과 날숨의 평형을 이루려고 노력하면서 그 '데코룸'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 홍지석

* 각주 1) Hans Hofmann, "On the Aims of Art"(1932), Art in Theory 1900-2000: An Anthology of changing Ideas, Charles Harrison & Paul Wood ed (Malden, MA : Blackwell Pub. 2003), p.372. 2) Hans Hofmann, op.cit., p.372. 3) 나혜석, 「아아 자유의 파리가 그리워-歐米漫遊하고 온 後의 나」, 『三千里』 1932. 1, 전집, p. 488. 4) Wladyslaw Tatarkiewicz, 이용대 역, 『여섯가지 개념의 역사』, 이론과 실천, 1990.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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