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두의 세상나들이

이범주展 / LEEBUMJU / 李範珠 / painting   2019_0626 ▶︎ 2019_0702

이범주_우리 별 주으러 갈래요?_순지에 먹, 분채_85×185cm_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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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00pm

갤러리 H GALLERY H 서울 종로구 인사동9길 10 3층 제3관 Tel. +82.(0)2.735.3367 blog.naver.com/gallh hongikgalleryh.modoo.at

사람이 지니고 있는 감각이 뛰어나다보면 세상 살기 힘들 때가 많다. 눈이 밝아 보이는것이 많고 귀가 맑아 들리는 것이 많으니, 세상사 피곤한 일이 한 두가지겠는가? 오감(五感)이 예민하다보니, 이 녀석들을 주머니속에 꼭꼭 숨겨놔도 바늘처럼 삐죽삐죽 튀어나와 몸을 찔러대곤해, 참 불편하고 복잡하다. 누군가 환쟁이는 그렇게 예민한 감각을 타고나야 한다느니, 없으면 만들어서 잘 키워야 한다느니 하지만, 예술가도 사람인지라 인간사, 세상사와 무관할 수 없기에 늘 기억과 망각 둘 중 한 쪽만을 선택해서 살아가야만 하는 어려움을 떨쳐버리지 못하곤 한다.

이범주_사라진다는 것(말 안하면 그냥 잊혀졌을거야)_순지에 먹, 분채_36×85cm_2019

주머니 속 바늘이 들려주는 이야기. ● "예전에... 날카롭게 빛을 뽑아내던 나는, 몸을 곧추 세워 찌를 듯이 저 하늘을 노려봤었어. 한 움큼 피를 토해내며 죄어오던 지옥같은 연기, 난 그 매캐함에 지지 않으려 고개를 들고 고함을 질러댔지... 하늘색이 먹빛으로 바뀌었을 때. 그제서야 난, 쉬어터져 단내나던 내 몸을 천천히 더듬어 봤단다. 붉게 녹이슨 얼굴, 앙상히 말라버린 몸 그리고 뭉툭해져버린 손. 난 조각나 버린 울분을 움켜쥐고 내 심장을 찔러댔었어. ● 아프지 않아! 그래. 나는 아프지 않아...,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부벼대는 아침 바람에 솔잎향이 가득해. 지금 난 하찮게 버려져 어디있는지 모르는 내 조각을 찾아 맞추고 있어. 한 조각 한 조각 꿰메어 볼록히 도드라진 상흔을 보듬어가고 있으면, 어쩜! 살아있음에 눈물이 나. 봐봐? 내가 찾은 조각들이 반짝였어. ● 너... 바늘이었구나. 나도 바늘이었는데..."

이범주_바닥을보면 밝히는 것_순지에 먹, 분채_36×85cm_2019

작가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낭중지첨(囊中之針)의 예민함을 숨겨두고 사람들과 대화를 즐겨한다. 갑작스런 질문을 통해 대화에서 모순을 발견해 내는 변증법적 소통방식은 마치 Marx 의 후예들처럼 추상적이고 철학인 담론이 지닌 경계를 벗어던지고 실질적으로 세계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혁명가의 모습과 닮아있다. 이런 소통방식들은 작가의 작품으로 이입되고 사유되어져 하나의 존재자가 다른 존재자로 이행되며 드러나는 상호 침투의 관계에서 파생된 반영의 의미를 찾아 구체적으로 규명하려 든다.

이범주_고사리와 새순과 솔방울 3개(그래도 말해줘서 고마워)_ 순지에 먹, 분채_36×40cm_2019

실재(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에게 던지는 수 많은 질문과 대답을 통해 결국 작가는 어떤것에 대한 개념을 세우고 그 개념을 통해 형상(실제)을 드러내며 이를 믿기 시작했다. 이후 이렇게 생성된 믿음을 기저에 두고 근본 개념에서 분화되는 모든 불안함을 해소시키고자 하고 있다. 작가의 작품을 통해 느껴지는 신념은 마치 종교와 닮아있다. ● 자신과 현재에 관한 물음. 그리고 그것을 통해 드러나는 '존재의 정의'. 과연 현대의 우리들에게 '존재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고 이것으로 파생되는 수 많은 잉여로운 감정들은 어떻게 시작되서 왜 몰입되고 어디로 사라지는가를 묻게 되는 이번 작품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우울과 유머러스의 대립적 이종교융(異種交融)형식의 교차적 화면구성을 통해 '서로에게 순응되어짐'이란 화두(話頭)를 던져주고 있다.

이범주_ER(질문을 잃어버린시대)_순지에 먹, 분채_94×62cm_2019

불경(佛經) 중 「나창경(癩瘡經)」에 "어리석은 범부가 6촉입처로 인하여 온갖 고통을 받는 것은 그 범부의 6촉입처로 인해 생긴 결과물에 탐욕을 내어 집착하는 것 때문이다"라고 했다. 즉 집착이 없어야 긍정하고 순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은 6촉입처가 만들어낸 결과에 따라 마음에 드는것에도 탐욕을 내지 않고, 마음에 들지않는 것에도 성을 내지 않는다는 것이니, 작가는 자신의 지닌 낭중지첨(囊中之針)의 산물의 경계에서 벗어나는 스스로의 방식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자성(自性)을 잊는 것 또는 자성과 대상간에 일체의 간섭이 없이 순리적인것(교융)으로 이해된다. 또다른 관점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으로 노자(老子)의 순응을 찾아 볼 수 있다.

이범주_화양연화_순지에 먹, 분채_40×36cm_2019

「도덕경(道德經)」에서 '화광동진(和光同塵)'을 설명하며, "현명한 사람은 자기의 귀와 눈과 코를 막으며, 자기의 뛰어난 점을 드러내지 않고 분수를 잘알아서 기세를 누그러뜨리며, 번거롭고 속된 속세에 합치니, 무엇을 얻었다고 가까워지거나 멀어지지 않고 탐하거나 해하지 않으며 귀하게 또는 천하게 여기지 않는다" 하였다. ● 작가가 화면을 통해 드러나는 '서로에게 순응됨'은 이런 '현동(玄同)'의 관점일 것이다. ● 모든 대상에 집착하지 않고 개별적이라는 이치, 같으면서 다르고 다르면서 같은 실상인 제물(齊物)적 시각, 이는 모든 대립됨을 공관(空觀)을 통해 재구성해낸 상즉성(相卽性)의 율(律)로 써 자신과 대상의 관계를 쌓여있는 솔잎 무더기를 이용해 반영시키고 있는 것이다. '현동'의 인식을 통해 드러나는 '존재됨', 이는 곧 '살아있음'이고 생존이다.

이범주_은주언니_순지에 먹, 분채_36×40cm_2019

생존 즉 생명력은 어떠한 것이든 고립되어 있지 않고 다른 것과 관계를 이루고 있는 사사무애(事事無碍)속 연기(緣起)를 통해 존재된다. 모든 것이 나로 인해 연기된 것이지만 나도 하나의 인간이라고 발버둥치고 있는 작가의 표상 안에서 현상과 현상, 나와 너, 주체와 타자가 서로 간섭하지 않고 다양성과 개별성에 순응하며, 다르면서도 같은 존재들를 잉태해 배양시키고 있다. ● "나는 하찮고 사소하고 보잘것없어서 역사 속에서 흐지부지 사라져가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그리고 싶어졌다." 라고 말하고 있는 작가의 노트 마지막 구절로 평을 마치고자 한다. "밟아도 밟히지 않으면서 각자의 고유성을 지켜내는 건강한 개인의 삶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의 그림을 보면서 그렇게 위로의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 장태영

Vol.20190626h | 이범주展 / LEEBUMJU / 李範珠 / painting